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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오늘도 #3B8C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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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사람들 가르치는 일을 비교적 잘하는 편이다. 나 혼자 잘나서 그런 줄로 한동안 착각하다가 문득 정신 차려 보니 교육업에 종사하시는 부모님 덕이었다. 아무튼 쉽게 알려주는 데에 조금 재능이 있는 거 같고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거도 좋아하다 보니 레슨 하는 일은 늘 즐겁다. 물론 어려운 점도 없지 않지만, 꽤 좋아하는 일이어서 내 ‘일’의 범주에서 빼놓을 수 없다. 무척 소중한 일이다. 여기서 처음 레슨을 시작할 때 가장 어려운 건 아무래도 언어였다. 줄을 뜯고 튕긴다는 말을 영어로 뭐라고 전달해야 하는지 난감해서 한참 영어 사전을 찾으며 헤맸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든 한국인을 상대로 하든, 한국 음악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경우에도 쉽지 않았다. 악보도 아예 읽어본 적 없는 음악적 초보인 분에게는 차근차근 알려..
연緣이 닿으면 노랗게 개나리꽃이 만개하고 나무마다 초록초록 새순이 맺혔다. 남쪽에서 출발한 봄이 이제야 여기에도 도착하려나 보다. 날씨가 누그러지니 며칠 동안 주변 이웃이 모두 집 앞 화단을 정리하느라 내내 분주했다. 초록이 맺히고 햇살이 쨍해서 사람들이 움직이니 괜히 나까지 마음이 설레서 올해 꽃을 더 심어볼까 싶어졌다. 작년에 우연히 심었던 미니장미가 늦게 심었다, 장미는 비료를 많이 줘야 한다 하는 주변의 관심 없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꽃을 피워 내준 덕에 더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핑크 미니장미 옆에 희고 푸른 수국을 심고 싶어 희망차게 꽃 농장으로 향했다가,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하고 잔뜩 시무룩해져서 돌아왔다. 장미 옆이 어쩐지 더 허전해 보여서 풀 죽어 했더니 동거인이 아직 연이 닿지 않..
매일 연습 날씨가 화창한 날이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져서 기분 좋게 연습 시간을 보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유 부릴 시간이 비교적 많아졌다. 다른 이들은 이런 시기를 틈타 거창한 일을 턱턱 잘 해내는 거 같다. 깊게 부러운 마음이 들지만 크고 거창한 일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이 기회에 작은 일을 꾸준히 하는 습관을 길러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던가, 아주 짧은 일기를 적어본다던가. 그중에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은 매일 연습하기이다. (뭐? 연주자라면서 연습을 ‘매일’ 안 했다고?? 같은 생각이 드는 분에게는, 음. 죄송합니다…) 덧붙이는 변명이지만, 생각보다 ‘매일’ 이란 건 정말 무섭고 또 어려운 일이란 걸 인제야 조금씩 느끼는 중이다. 매..
2021년 1월 사람이 정말 오래 살고 볼 일 인 게, 팬데믹이라 계속 집에만 있어서인지 뭔지 요즘 스스로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전이라고 물론 운동을 시도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집 근처에 있는 시설 좋은 대형 피트니스 센터가 망할까 봐 굳이 꼬박꼬박 회비를 내고는 혹시 망하지 않았나 확인차 가끔 들르곤 했었다. 나처럼 걱정해주는 회원이 많은 덕에 늘 쾌적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한 번씩 들려 마치 시설 점검자처럼 이 운동 기계, 저 운동 기계를 전전하며 몇 번 조작을 해보곤 내일 꼭 점검하러 또 와야지 생각하고 다시 기부금처럼 다음 달 회비를 내곤 했다. 생각해보면 요즘처럼 어려울 때 했어야 하는 비고의적 선행이었다. 아주 예전에는 우연히 요가에 취미가..
올 한 해 고생 많으셨어요 시각적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누군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일부러 제거한 듯 느껴지는 순간. 눈 오는 날의 고요함은 늘 그렇게 느껴집니다. 눈으로 보이는 화려함에 비해 귀로 들리는 소리가 무엇도 없어서, 가끔 직접 눈을 맞으면서도 ‘눈이 오는 이 풍경이 참 비현실적이다.’ 하고 혼잣말이 나와요. 캐나다에서 국악 공연을 할 때도 늘 비슷한 기분이 들어요. 내가 있는 장소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연주하고 있는 음악이 어딘가 일치하지 않는 기분이라 항상 비현실적이고 또 신기하게 느껴져요. 여기서 국악 공연을 하다니… 하는 생각에 더욱 신기하고 또 감사하기도 하구요.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다지만, 공연을 준비하고 선보이는 과정이나 마음가짐이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여러 번 반복..
내가 귀여워서 그래 건강한 정신을 위해 어느 정도 자아를 분리해 두고 사는 편이다. 아이돌처럼 주로 나이가 어린 연예인에게 기획사에서 그들의 인성 교육을 할 일이 아니라 일을 하는 동안 빼서 쓸 수 있는 ‘일하는 자아’를 분리하는 걸 알려주면 좋겠다(물론 기본 인성이 쓰레기가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제 일을 책임감 있고 전문성 있게 끝마친 후 퇴근하고 나면 더는 억지로 웃지 않고 굳이 무리하여 친절할 필요도 없도록. 그래야 본인이 하고 싶은 일도 오래 건강히 할 수 있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바닥에서 본인의 인생 설계도 잘 할 수 있는 거 같다. 가면을 쓰고 사는 게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퇴근 이후에도 사생활로 굳이 비집고 끼어드는 무례한 미디어나 팬 등에게 ‘업무 끝났으니 내 사생활에서 꺼지라’고..
산책을 하다가 며칠 전 얕은 첫눈이 쌓여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가 싶더니 기온이 다시 영상 20도 언저리를 맴돈다. 낙엽이 지나가고 앙상해진 가지 사이를 걸으면서 느끼는 따뜻한 날씨가 좋으면서도 이상하고 또 걱정스럽다. 얇은 티셔츠에 가디건만 걸치고 나왔는데, 가디건이 성가시도록 더웠다. 올여름 한국이 장마로 시름 하는 동안 이곳은 유례없던 폭염에 시달렸다. 거창해서 좀 웃기지만 나는 지구 혹은 인류의 존속 여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다. 모두를 위해 당장 무언가를 멈추고 행동해야겠지만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모두를 위한다지만 그 모두가 어디에서 누구까지 포함하는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미 늦어버린 건 아닐까 절망스러운 마음도 간혹 든다. 하지만, 가끔 지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 해나가야 한..
전시회장을 다녀와서 좋은 기회가 생겨 반 고흐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회에 다녀왔다. 나로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새로운 형태의 관람이었다. 객석 위치에서 앉거나 서서 관람하는 음악이나 공연 같은 것도 아니고 조용한 전시관을 다니며 사진이나 그림 등을 감상하는 형태도 아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고흐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빛에 온통 둘러싸여 압도당했다. 세심하게 고르고 작업 되었을 음악이 고흐 작품과 함께 흘러가는 그 가운데에 내가 놓여 있었다. 새롭고 엄청난 경험이었다. 전시회장에 들어가기 전,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으로 장내에 일정 관람객 수를 유지해야 해서 잠깐 줄을 서서 기다렸다. 양옆에 걸려 있는 고흐에 대한 토막 설명이 지나가는 화면을 무심히 쳐다보다 문득 마음이 철렁할 정도로 크게 눈에 들어오는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