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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가 저물기엔 너무 이르다 -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신승원의 퇴단을 바라보며 나보다 발레를 오래 본, 연상의 지인이 한동안 무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함께 성장한 무용수들의 은퇴 소식이 전해졌던 때였다. 콩쿠르를 누비던 주니어 때, 신인 시절, 솔리스트, 주역 데뷔를 다 기억하는데 어느새 은퇴 공연을 올리고 무대에서 내려온다니 적응이 되지 않는다면서. 아직도 거침없는 젊은 시절이 생생한데 발레계에서 흐르는 시간은 일반적인 기준과 다르다고. 특히 국내 무대에 비슷한 시기를 거쳐온 주역급 무용수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한 세대가 저물었다는 기분에 잠시 서글퍼졌다고 밝혔다. 그분께서 언급한 무용수들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무대에 서고 계시지만, 큰 전막 무대를 기대하긴 어려운 사정이다. 언젠가 나도 저 시기를 거치겠거니 했다. 그래도 아직 내가 보고 자란 무용수..
쿠폰으로 받는 보수 공연 제안이 들어왔다. 아직 코로나로 조심스러워서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진행하는 행사이니 연주 영상을 찍어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새롭게 찍지 않고 그동안 찍어둔 영상 중에서 적당한 길이를 보내줘도 괜찮으나 퓨전은 안되고 꼭 전통 연주곡이어야 한다고 덧붙여 있었다.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어서 공연비를 물어보니 Uber Eats 150불 크레딧이면 괜찮겠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우 괜찮지 않다. 이거면 한 두 끼 밥은 먹겠지라는 생각으로 책정한 ‘보수’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연 비디오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겨우 한두번의 끼니를 보상해주는 정도보다 훨씬 더 품이 든다. 게다가 특정 앱의 크레딧 같은 건 일을 하고 받는 보수로 절대 적절하지 않다. 이 보수가 적당하다고 결정한 이는..
2022년 발레 공연 라인업 소개 전막이 예년보다 줄어든 게 아쉽다. 유니버설발레단 일정이 평소보다 늦게 떠서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글이 다소 늦어졌지만, 뒷북이라도 정리해두겠다. 재연 텀이 짧다는 느낌. 차라리 더 보완해서 봄 이후에 넣으면 좋았을 텐데. 아, 근데 왜 주얼스라고 쓰는 걸까. 이미 보석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주얼스 영문 폰트를 넣어서 만든 포스터가 더 세련된 느낌도 아니라서 의문. 기대치 ●○○○○ 캐스팅 역시 복사 붙여넣기. 뉴 페이스로 연습할 기간이 없겠지만! 작년 캐스팅 조합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기에. 다양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에서 평소와 거의 다를 바 없다니. 핑크 다이아몬드 의상도 수정이 어렵겠지. 추천 ●●○○○ 그래도 작년 초연을 안 봤다면! 조금이라도 더 정돈됐나 궁금하다면! 올해는 패스. 작년..
부럽다, 스걸파 타인을 부러워하는 게 만사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아는데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얼마 전 종방한 십 대 댄서 경연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랬다. 나의 십 대는 어땠더라. 솔직하고 호탕한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보며 예전의 나를 돌아보게 됐다. 나도 참가자들처럼 일찌감치 내 길을 정해서 달렸다. 좋아서 시작했고 내 바람대로 일반고에 진학한 주변 학생들보다 내가 원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 투자를 할 수 있었지만, 나도 저렇게나 내 길을 즐기고 아끼며 걸었던가. 돌아보면 그 길 위에 있어서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보다 위축되고 자책하던 시간이 더 많이 떠오른다. 무대에 오를 기회를 아깝게 놓치고 나면 그 기회가 세상의 전부였던 듯 크게 실망하고 마음이 쭈그러들었다. 얼른 일어나 툭툭 털고 그저 다음 기회..
2021년 발레 감상 연말 결산 소생글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 1년 공연을 모아서 연말 결산 글을 올리는 목표를 세웠는데 작년엔 웬만한 공연이 다 취소되는 바람에 유의미한 통계를 내기 어려웠다. 올해는 30회 정도는 감상해서 정산할 만한 횟수를 채웠다. 드디어! 연말결산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1. 올해 가장 좋았던 공연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 할로윈데이 시즌과 맞물려서 더 분위기 있었던 지젤. 특히 홍향기-이동탁 페어의 지젤은 모든 부분에서 내 예상을 뛰어넘으며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 무용수들이라면 이렇게 하겠지, 어느 정도 상상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전부 산산조각이 나서 더 의외성 있었다. 심지어 리앙 시후아이의 힐라리온까지,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는 조합이었다. 살다 보니 힐라리온 캐릭터가 다 안쓰러워지네? 며칠 ..
2021년 11월 벌써 올해도 12월에 들어섰지만, 조심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하다. 연말 행사가 거의 사라져서 마치 시즌제 직업처럼 스케줄이 조용해졌다. 아직 작은 이벤트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한 해의 큰일들이 거의 지나갔고 지금은 여름 야외 공연이 한창일 때보다는 확실히 여유가 많아졌다. 지난달에는 속해있는 앙상블의 창단 연주회가 있었다. 여기 오고 처음으로 넉넉한 연습 기간을 가지고 준비했다. 연주자 스케줄과 주최 측의 예산 문제로 늘 준비와 연습 시간이 촉박했는데 이번에는 여러 상황이 잘 맞은 덕분에 2주간 집중 연습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음악과 악기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본인 음악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함께 모여 서로의 다름을 충분히 수용..
엉뚱한 꿈 기록 꿈을 꾸지 않아야 제대로 된 숙면이라는데, 난 잠을 얕게 자는 편이라 평소 별의별 꿈을 다 꾼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부터 시작해서,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공상은 했을 법한 상황, 현실과 아예 유리된 꿈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매우 구체적이다! 잠들기 전에 본 콘텐츠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하고, 다음날 계획이 어그러진 꿈을 꾸기도 한다. 최근에 제일 많이 꾼 현실적인 꿈은 다름아닌 공연 취소다. 지긋지긋한 코로나 사태 이후로 임박해서 취소당한 적이 많고, 최근에는 공연장 스태프 파업으로 인한 취소까지 겪어서인지 공연을 앞둔 시기에는 비슷한 꿈을 많이 꾼다. 그러면 일어나서 내 티켓이 무사한가 확인한다. 공연 중 막이 갑자기 내려온다거나, 음악이 안 나온다거나, 내가 예매한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서 바득..
할로윈데이의 윌리!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로맨틱 발레의 대명사 은 가을과 특히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1막은 노릇노릇 무르익은 흙내음 나는 농가, 2막은 스산한 무덤가를 보여준다. 1막은 햇빛 쨍쨍한 낮, 현실 세계, 수확기의 생명력. 2막은 달빛 내려앉은 밤, 영혼의 세계, 삶과 죽음의 경계다. 일교차가 큰 가을 날씨에 걸맞는 레퍼토리인데, 이번 시즌은 특히 절묘했다. 할로윈데이 시즌과 지젤이 겹치다니! 딱 맞닿는 테마다! 지젤은 어떤 무용수가 표현하는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10월 30일 6시는 홍향기-이동탁 페어였는데, 이 조합의 지젤은 처음이었다. 티켓팅을 한 다음에 뜬 캐스팅인데, 안정적으로 볼 수 있는 페어인 만큼 기대를 걸었다.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스테레오 타입에서는 다소 벗어난 무용수라고 생각됐다. 전형적인 이미지도 좋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