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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엉뚱한 꿈 기록

 꿈을 꾸지 않아야 제대로 된 숙면이라는데, 난 잠을 얕게 자는 편이라 평소 별의별 꿈을 다 꾼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부터 시작해서,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공상은 했을 법한 상황, 현실과 아예 유리된 꿈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매우 구체적이다! 잠들기 전에 본 콘텐츠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하고, 다음날 계획이 어그러진 꿈을 꾸기도 한다.

 최근에 제일 많이 꾼 현실적인 꿈은 다름아닌 공연 취소다. 지긋지긋한 코로나 사태 이후로 임박해서 취소당한 적이 많고, 최근에는 공연장 스태프 파업으로 인한 취소까지 겪어서인지 공연을 앞둔 시기에는 비슷한 꿈을 많이 꾼다. 그러면 일어나서 내 티켓이 무사한가 확인한다. 공연 중 막이 갑자기 내려온다거나, 음악이 안 나온다거나, 내가 예매한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서 바득바득 우기며 일어나질 않는 꿈은 꾸준하다. 직간접적으로 겪은 일이라 더 생생하게 나타나는 모양이다. 티켓을 잃어버리는 꿈은 한 스무 살 무렵부터 단골이다.

 현실과 망상을 버무린 꿈도 꽤 자주 꾸는데, 내 전공 관련이다. 무슨 일인지 난 꿈속에서 졸업연주를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연습하던 곡이 안 풀려서 변경했다거나, 무대에서 갑자기 막힌다거나, 당일에 구두가 없어졌다거나, 메이크업이 맘에 안 든다거나, 연주 순서가 꼬였다거나, 페달을 잘못 밟는 등 현실에 있을 법한 상황부터 시작해서 꿈에서도 말이 안 된다고 느껴지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아마 11월이 졸업연주 철이라 꿈을 더 많이 꾸는 듯하다. 난 연주를 준비하던 도중 졸업을 유예해서 5월에 정식 연주회를 했기 때문에, 이 꿈은 봄 가을 전용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11월에 마칠 걸 그랬나? 계속 꿈에 시달릴 줄은 몰랐지! 난 분명히 졸업연주를 마쳤는데 기록이 사라져서 졸업을 하지 않은 상태라면서 다시 불려나간 일만 몇 차례다. 꿈인데도 연주 실력은 상향되지 않는다. 평소보다 형편없으면 모를까.

얼마 전의 꿈에선 졸업연주회 방침이 바뀌어서 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고 지정곡 리스트가 뜬다고 했다. 비교적 간단한 곡과 조금 더 학구적인 곡 그리고 대곡을 선택해서 연주할 수 있는데, 각기 조건이 다르다. 일반 학과 학생들도 졸업연주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대체 왜?) 어렵지 않은 곡들이 일부 포함이란다. 슈만 즐거운 농부, 슈베르트 군대 행진곡, 멘델스존 꽃노래,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op3 no2 (click), 하차투리안 토카타(click)가 목록에 있었다. 마지막 두 곡은 난이도가 좀 높아졌는데? 또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나 애니메이션 OST도 가능했다. 나한테는 크게 어렵지 않은 곡들이다. 너무 도전정신이 없는 것 같지만 그냥 편하게 갈까? 잠시 혹했는데 유의사항이 있었다. 단, 200학점의 영어 수업을 듣고 학점을 이수하여야 함. 200시간이라고 해도 황당한데 200학점이요? 선택하지 말라는 소리인가요?

얼른 학구적인 곡으로 옮겨왔다.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하이든 소나타 No.60, Hob.XVI 50(진짜 작품번호까지 나왔다!!), 베토벤 소나타 No 15, Op 18 Pastoral(click), 쇼팽 발라드, 프로코피예프 어떤 곡 등등. 시대별로 배분한 느낌이었다. 전악장이면 하이든이 제일 편한가? 난 베토벤을 더 좋아하는데. 연주효과로는 역시 쇼팽인가? 갈등하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드뷔시를 치라고 하셨다. 참고로 내 졸업연주곡은 드뷔시 모음이었다. 꿈에서라도 다른 곡을 좀 칩시다!

대곡 목록은 제대로 읽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click)처럼 난해한 현대곡부터 관현악과와의 브람스 콘체르토가 있었던 것 같다. 교수님이 이쪽도 고려하라며 처음 보는 현대곡 악보를 주셨는데, 악보 자체가 어렵진 않은데도 전혀 읽히지 않았다. 마치 아이가 그린 듯한 장난스러운 악보 배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꿈인데 이만큼 자세하게 나오는 게 신기하다. 게시판과 학과 홈페이지 같은 텍스트가 나오는 꿈이라니! 졸업연주회 곡이 제한적이라면 중복도 많을 테고 인기곡이 매년 비슷할 테니 지루하지 않을까. 꿈이라서 다행이다.

알프스 산맥에서 담요로 꽁꽁 싸매고 야외 발레를 본 꿈도 황당하지만(인권침해로 논란된 염전 발레 이후에 꾼 꿈이다!) 느닷없이 발레 무용수가 되는 꿈은 정말로 난처하다. 내가 갑자기 객원이 된다거나, 낙하산 수석으로 입단한다거나, 주역의 대역을 맡는데 동작을 전혀 따라할 수가 없다. 머리로는 다 외웠고, 용어도 잘 알지만, 몸은 다른 법. 실제로 배웠을 때 어떻게 해도 안 됐던 턴이라거나, 긴 발란스는 꿈에서조차 꿈도 못 꾼다. 최애 중 하나가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꿈도 꿨다. 난 최애에게 볼썽사나운 꼴을 보여주며 레슨을 받고 싶지 않건만! 얼마 뒤에 그 무용수가 성인 기초 발레 특강을 나간다는 소식을 봤다. 꿈이든 현실이든 관객으로만 보겠습니다.

발레단 시리즈 중 가장 인상적인 꿈을 기록해두겠다. 전공은 다르지만, 블로그 활동을 높게 사서 특채로 입단이 결정됐다는 소식이었다. SNS 관리, 사이트 공지사항과 단원 프로필 기입, 홍보팀 정도라면 할 수 있겠지만, 제가 왜 무대에 서야 하나요? 심지어 며칠 뒤 지젤을 공연하니까 안무를 숙지하라는 게 아닌가. 절대 못 따라한다고 했더니 2막만 나오면 된다고 회유했다. 지젤의 백미인 윌리 군무에 줄도 못 맞추는 나를 투입시키면 큰일인데, 단원들은 왜 납득하는 표정이지? 저, 저를 세울 게 아니라 그 옆에, 예고 학생들 데려오면 되지 않을까요?

공연 당일 우왕좌왕한 상태로 내 의상을 꺼냈는데 한 겹이 쭉 찢어졌다. 의상이 망가져서 무대에 못 서겠다고 얘기했더니 어떤 남성 무용수가 뛰어왔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저희도 흔한 일인데 라이터로 지져주면 짠, 바로 붙는답니다. 놀랍죠! 실제 상황이면 의상 담당을 불러야 할 텐데 꿈이라서 엉망이다. 의아한 상태로 옷을 입었는데 날개가 불에 그을렸다. 그 와중 2막 10분 전이라며 스탠바이 소리가 들린다. 역시 못 서겠다고 했더니 한 여성 무용수가 격려해줬다. 내가 20년 넘게 무대 서서 아는데 대충 시침핀 꽂아서 돌돌 말고 아라베스크를 최대한 높게 들면 안 보여. 돈키호테면 모를까 지젤이면 조명이 어두워서 안 보일 거야. 네? 분명히 헛소리인데 또 말이 된다? 날개를 신경쓰며 살금살금 움직이다가 깼다. 급여와 공연수당은 못 챙겼다!

또 어느 날은 다른 발레단 발레리노가 됐는데, 근육량이 적고 유난히 마른 몸이었다. 키는 170대인데 체중이 48밖에 안 나간다. 왜 꿈에서도 몸이 부실하고 근력이 없는 거죠? 수석무용수 중 파트너를 고를 수 있다는 말에 무게중심이 괜찮은 게 누구일지 한참을 고민했다. 결정을 보류하려고 아픈 척 의무실 침대에 눕기까지 했다. 실제로 장신 수석무용수가 없는 발레단이라서 아담하고 가벼운 발레리나를 선택했다. 그 와중에 내 의상은 핫핑크라 매우 튀었다. 한참 헤매다가 리프트에 능수능란한 다른 수석무용수의 특별 지도까지 받았다. 힘을 주고 덜어내는 타이밍을 날 직접 들어가며 몸으로 알려줬는데 그래도 쉽지 않더라. 깨고 나니까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감히? 그분을 들 생각을 해? 게다가 작은 파트너밖에 못 든다면 박탈감이다. 이왕 꿈인데 적절한 근육량과 점프 실력을 가지고 나오면 안 되나? 이 몸으로는 파트너한테 너무 민폐다. 그런데 현실에서 꿈 속의 나보단 몸 상태가 훨씬 괜찮아 보이는데도 서포트가 제대로 안 되는 사람들이 있네? 내가 저 주역이었으면 파트너를 불안하게 다루진 않았을 텐데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서 반영된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어제 꿈이다. 슈퍼마켓에 들어갔는데 한쪽에 피아노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더듬더듬 동요를 치고, 사장님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광경이 보였다. 신기해서 넌지시 물어봤더니 부업으로 기초 피아노를 교습하면서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사실은 음대생인데 한 학기 3학점만 남겨두고 졸업을 못한 상태라서 등록금을 모을 겸 레슨을 한다나? 30분당 1520원(이 금액은 뭘까?)이고 매일 선착순으로 수강생을 받는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등록금은 어느 세월에 모으려고?

전공자면서 못 치는 척 장난치는 유튜브 영상을 많이 본 탓인가? 꿈 속의 난 장난기가 발동했고, 50분 레슨을 신청했다. 곡 선정은 자유니까 처음엔 간단한 기초 교재, 다음엔 쇼팽 마주르카 Op7-2를(Click) 자신 있게 연주해서 깜짝 놀라게 만든 다음, 마지막은 쇼팽 에튀드를 쳐야지! 초보자 연습곡을 어설프게 친 다음에 쇼팽 마주르카를 외워서 치는데, 어? 뒤쪽에 음색을 바꾸는 부분에서 왼손을 까먹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저렴한 레슨비로 마지막 등록금을 모으는 분을 놀려먹으려는 마음을 가져서 벌 받은 게 분명하다. 잠에서 깨자마자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고1 때부터 손 풀고 싶을 때마다 암보해서 쳤던 곡인데, 진짜 꿈이랑 동일한 부분에서 가물가물했다. 왜 이런 부분만 현실과 맞는 걸까?

뻑하면 꿈을 꾸니까 수면의 질이 낮아질 수밖에! 기억이 선명할 정도로 생동감 있는 꿈을 꾸면 일어났을 때 머리가 띵하다. 무시무시한 악몽보단 그나마 재미있는 축에 속해서 바로 메모해두는데, 뒤죽박죽 꿈에도 패턴이 있고 공통점이 존재한다. 내 무의식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걸까? 어쨌든 평소 안 되던 부분은 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

예술적인 꿈도 좋지만, 이왕이면 푹 잠들었으면 한다. 갑자기 무용수가 되거나, 도무지 안 읽히는 악보로 졸업연주회를 다시 해야 하는 꿈은 사양이다. 제발 오늘은 갑자기 무대로 끌려 나가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