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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유니버설발레단 X 정동극장 챔버 시리즈

유니버설발레단 X 정동극장 백조의 호수 & 잠자는 숲속의 미녀  

정동극장의 장점 : 가까워서 표정, 손끝, 디테일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잘 보인다. 아늑한 소극장 느낌이다. 무대가 전체적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정동극장의 단점 : 좁은 공간에 맞추느라 동작이 작아진다. 군무를 풍성하게 보여주기 어렵다. 직원들이 계속 주의사항을 외쳐서 피로감이 높다.

맑은 하늘과 함께. 정동길 풍경.


<백조의 호수> 

정동극장을 방문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로비부터 시작해서 많이 협소하다는 인상을 줬다. 코로나 시국 이전과 달리 입구에 커다란 비접촉식 체온계와 QR 체크인, 손소독제까지 비치하느라 공간이 더 좁아지지 않았나 싶다. 무대도 작은 편인데 대작들을 어떤 식으로 구성했는지 궁금했다.

어린이 청소년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해설이 시작된다.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고, 백조를 표현하는 폴드브라를 보여주며 공연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다. 짧은 시간에 백조의 호수를 보여준다면 백조 등장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예측했는데, 1막 지그프리드 왕자의 성인식부터 나왔다. 개인적으로 깜찍한 광대를 좋아하기에 리앙 시후아이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긴장이 풀리며 기분이 상쾌해졌다. 소규모 왈츠 군무를 보자 단원들이 많이 빠진 게 느껴졌다. 작은 무대에는 잘 어울리는 최소 인원 구성이었고, 그 와중에 오타 아리카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호두까기 인형 클라라로 세워줬으면!

지그프리드 왕자를 맡은 이동탁은 신체 가동 범위가 워낙 넓은 무용수이기에 좁은 무대가 아쉬웠다. 그 와중에도 결혼에 관심없는 모습, 고뇌에 빠진 표정, 왕족다운 기품을 성심껏 표현하려고 애썼다. 오데트 공주를 맡은 홍향기는 의지가 강한 백조라는 인상이었다.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기보다는 선택한다는 이미지. 자주 만나는 페어인 만큼 안정적인 파드되를 보여줬다. 작은 백조와 큰 백조 춤처럼 유명한 장면도 나왔다. 지난 봄 군포에서의 해설 백조의 구성과 흡사했다.
흑조 파트 없이 피날레로 바로 이어져서 아쉬웠다. 왕자의 잘못된 선택을 알려주는 장면이 사라지니까 이어진 비극이 다소 급작스러운 느낌. 그러나 백조의 환상적인 모습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좋은 맛보기 구성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부족하니 생략할 수밖에 없겠지만, 다른 무용수가 흑조를 했으면 어땠을까 잠시 상상해봤다. UBC는 예전에 백조와 흑조를 다른 캐스팅으로 올린 적이 있다. 인력과 시간이 해결된다면 그 방법도 신선하지 않을까?

로트바르트의 날개를 찢었으나 결국 오데트도 지그프리드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원래 백조의 호수 자체가 다양한 결말이 존재하고 특히 UBC는 마지막을 자주 바꾸는데,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에 봤던 버전이 기억에 남는다. 오데트가 로트바르트에게 달려들거나, 최종적으로 오데트만 백조로 살아남는 결말도 언젠가 올려줬으면 좋겠다.
 원래 지역 공연에도 갈 예정이었는데 당시 4단계로 격상한 초창기였기에 굳이 타 도시로 이동하는 게 불안해서 포기했었다. 여러 지역에서 전막 공연을 돌고 온 덕분인가, 군포 해설 백조 때보다 전반적인 움직임이 유려해졌다. 정동극장이라는 제한적인 무대에서 최소 인원으로 구성한 최상의 무대였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차이콥스키 3대 발레 중 가장 긴 대작이다. 잠미녀는 러닝타임이 길고 스토리 전개보다는 춤에 치중하며 디베르티스망이 많아서 초심자가 감상하기에 어려운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작품이기에 백조보다 잠미녀를 더 기대했다. 잠미녀 전막에 도전하기엔 아직 거리감이 있지만, 어떤 분위기인지 느끼고 싶은 관객은 짧은 하이라이트부터 봐도 괜찮겠다. 학구적인 전막은 발레를 깊게 공부하는 사람에게, 챔버는 잠미녀를 알긴 아는데 전막은 어려운 초보 관객에게 좋은 듯하다.

카라보스의 저주, 16세 오로라 공주의 생일 바리에이션, 로즈 아다지오, 결국 잠든 공주, 왕자의 등장, 결혼식까지 꽤 부드러운 연결로 보여준다. 백조는 흑조 파트가 생략돼서 스토리 연결감은 좀 떨어졌는데 잠미녀는 더 규모가 큰 대작임에도 최소한의 시간에 스토리 전개와 하이라이트 춤을 다 보여주려고 손질한 게 보인다. 작년 발레축제 땐 결혼식만 보여줬다면 이번엔 서막과 1~2막도 포함이라서 주요 장면은 다 맛본 느낌!

잠미녀의 숨은 주인공은 카라보스와 라일락 요정 아닐까! 카라보스를 맡은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는 사악한 역할을 즐기면서 무대를 활보했다. 큼지막한 마임부터 휘황찬란한 걸음거리, 카라보스의 존재감이 무대를 메웠다. 공주에게 저주를 내리고 신경질적인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줘서 다소 쪼잔한 모습까지 잘 나타냈다. 화려한 화장과 눈에 띄는 네일아트까지, 진정으로 즐기는 악역이었다.

라일락 요정의 이가영은 언제 봐도 강렬한 무대 장악력이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라일락 요정 그 자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무용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라일락 요정이기에 작년에 전막이 취소된 게 다시금 아쉬워졌다. 잠미녀 전막 올릴 때 라일락 캐스팅도 꼭 미리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카라보스와 동등하게 싸울 수 있을 법한 파워! 데지레 왕자를 인도할 때. 공주를 위해 왕자를 찾아다니는 믿음직함. 축복을 내리는 모습까지!! 그 멋진 자태에 또 반함.

오로라 공주는 단순히 연약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아니라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될 만한 위엄과 너그러움, 또 당당한 모습을 지닌 캐릭터다. 스토리만 보면 여리여리한 공주 같지만, 어마어마한 체력이 필요한 작품이다. 백조에 이어 잠미녀도 홍향기 주역이었는데 자기 주장이 뛰어난 오로라였다. 이 와중에 공주에게 청혼하는 왕자들이 수석무용수 총출동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차례대로 위풍당당하게 등장하는데 그건 그것대로 코믹한 장면이었다. 특히 백조 때 파트너였던 이동탁은 누구보다도 여유로운 포즈로 등장했는데, 서로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왕자 4로 등장하는 수석무용수라니! 

2막부터 등장하는 데지레 왕자는 강민우였는데 나오는 순간 무대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현재 수석무용수 중 가장 노블한 캐릭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무대미술이 없는 2막의 허전함을 달래줄 만큼 아름다운 라인이었다. 수려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면서 스토리를 완성시킨다. 라일락 요정과의 투샷만 봐도 풍성해지는 기분이었다. 2막에서 데지레 왕자가 밍숭맹숭하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 (누구라고는 밝히지 않겠으나, 2막을 반 이상 날려먹은 적이 있다!) 전막이 아니라서 너무 아쉬웠다.

결혼식은 작년 발레축제에서 보여준 오로라 웨딩보다 약간 축소됐다. 파랑새, 늑대와 빨간 두건 소녀, 고양이 춤이 등장하고 여섯 요정들은 의상만 입은 채로 무대를 장식했다. 특히 빨간 두건 소녀의 사공다정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가 눈에 띄었다. 대망의 그랑 파드되는 극장 크기에 맞추느라 바리에이션이 생략됐으나 피쉬 다이브는 확실히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모든 하객이 나와서 축하하는 춤을 추며 라일락 요정의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요정들의 춤과 가랜드 왈츠, 결혼식 폴로네즈를 비롯해 군데군데 생략된 춤이 아쉬웠으나, 무대미술도 가져왔고 주요 장면을 다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보였다.

백조 때는 커튼콜 촬영 금지. 잠미녀는 허용이라서 사진을 찍어봤다.

대작 발레의 일부만 감상했더니 전막에 대한 갈증이 더 깊어졌다. 내년에는 예술의 전당처럼 넓은 대극장에서 화려한 규모의 전막을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