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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국립발레단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무브먼트 시리즈 6

국립발레단 Movement Series 6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8/28~8/29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프로그램 국립발레단 무브먼트 시리즈가 6회를 맞이했다. 이번 무브먼트는 오랜 시간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활약했으며 현재는 발레단을 지도하는 이영철 발레 마스터의 공식 은퇴 공연을 겸했다. 총 8개 작품 중 특히 기억에 남은 작품들을 서술하겠다. 

강효형 안무가 <Mannequin's story>
무브먼트 시리즈 중 가장 유머러스하고 즐거웠던 안무작이다.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흐르면 마네킹의 주인 이수희 무용수가 등장한다. 마네킹 역할의 무용수들을 배치하고 자리를 떠나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진짜 마네킹인 양 천연덕스럽게 무표정을 짓고 주인의 손에 의해 딱딱하게 움직이는데 관절이 어쩜 저렇게 인형처럼 움직일 경이롭고 신기했다. 주인이 퇴장하자마자 표정이 환해지면서 익살스럽게 움직인다. 팡팡 뛰어다니고 서로 노닐고 소품들도 치우는데 마치 토이스토리 같은 애니메이션을 관람하는 기분. 새빨간 의상에 개성 강한 머리모양으로 신나게 돌아다닌다. 주인이 돌아와서 뭔가 달라진 것 같아서 의아해하지만 마네킹들은 감쪽같이 모른 척 멈춰서 포즈를 취한다. 쉬운 스토리텔링으로 에너지 넘치고 깜찍한 안무를 만들어냈다. 누구나 인형이나 마네킹에 생명을 부여하는 상상을 하는데, 춤으로 구현시키는 방식이 재치 넘치고 세련됐다. 개인적으로 강효형의 안무 중 제일 취향에 맞았다. 한국적 안무로 유명한데, 팝아트처럼 통통 튀고 코믹한 느낌을 더 자주 시도했으면 한다. 설명을 읽지 않았어도 내용을 알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단순한 스토리에 참신한 생명력을 불러일으킨 안무작이다.

배민순 안무가 <Hero>
남성 무용수만 9명 나오는 작품이다. 수면부족을 이겨내고 이틀 연속 관람하기로 마음 먹은 작품. 이 구성을 더 확장시켜서 보여주면 좋겠다. 이 작품은 집중해서 볼 가치가 충분했다. 바흐 프렐류드와 푸가로 시작해서 파르티타까지 바로크 음악에 맞춰서 보여주는 춤의 향연이 아름다웠다. 남성 무용수의 색채미를 담뿍 담은 안무작이다. 동일한 동작에서 파생된 춤의 물결이 개성 넘치게 넘실거리며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무조건 강한 남성미와 엄청난 테크닉만을 강조하지 않고 부드러움과 섬세한 라인도 적절히 안배해서 미적으로 극대화한 안무다. 특히 중간에서 붉은 의상 입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엄진솔 무용수는 마치 디바 같았다. 존재감이 흘러 넘쳤으며 관절 하나하나에 눈길이 갔다. 넘쳐나는 끼를 마음껏 발산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더 다양한 역할로 보고 싶은데 무리일까? 김기완의 정교한 랑베르세 동작도 기억에 남는다! 다리 근육이 잘 보이는 의상이기에 몸 사용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남성 간의 파드되를 담은 점도 취향이었다. 안무 소화력 높은 무용수들이 눈에 띄었다. 커튼콜 때 머리카락을 휙 넘기며 배민순 안무가를 데려오는 엄진솔 무용수의 모습까지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줬다. 진정으로 춤을 즐기는 게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김경림 안무 중 Dear (출처 : 국립발레단 인스타그램)

김경림 안무가 <Dear>
가장 기대작이었다. 내가 감명 깊게 본 윤희에게 영화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니 어떤 작품이 나올지 궁금했다. 게다가 캐롤 OST를 사용했다. 퀴어 영화 두 편의 이미지가 들어간 작품을 국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일단 감동적이었다. 설정부터 벌써 두근거리는데 실제로 보고 나니까 더 설렜다! 하늘하늘 긴 의상을 입은 두 발레리나가 나와서 서로를 갈망하듯이 무대를 수놓는다. 백허그하는 장면이 정말 애틋해서 눈에 오래 담고 싶었다. 서로 절절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상대방의 자취를 좇으며 그리움을 표현한다는 인상. 마지막쯤에 둘이 손가락을 몇 번 맞대며 눈을 마주치는 안무가 특히 마음에 남는다. 뒤돌아 있는데도 감정이 뚝뚝 넘쳐흐르고 팔을 잡는데 또 로맨틱한 정서가 넘실넘실 넘친다. 첫 안무작이라는데 어쩜 이렇게 마음을 촉촉하게 물들이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토요일에는 김경림 안무가와 곽화경 무용수였고 일요일은 이은서 무용수와 곽화경 무용수인데 이틀 분위기가 또 달라져서 새로운 인상읏 줬다. 토요일은 좀 더 깊고 절박한 느낌이라면 일요일은 좀 더 서정적이고 애처로운 느낌. 짜임새 뛰어나고 완성도가 높아서 영화 배경인 겨울쯤 또 보고 싶은 안무다. 공기 중에 감성적인 편지를 써내려가던 작품. 흩날리던 긴 머리까지 함께 춤춘다. 모든 안무작 통틀어서 제일 낭만적이었다.

이영철 안무가 <죽음과 소녀>
공식적인 은퇴작. 슈베르트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내 예상보다 더 무겁고 많은 성찰이 담긴 작품이었다. 시사하는 바가 커다란 안무작이다. 전세계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안타까운 사회적 이슈를 녹여냈는데 그 계기가 딸의 탄생이라는 점이 더 마음에 남는다. 새로운 생명을 만나서 행복할 시기에 또 다른 곳에서 고통받고 스러진 생명을 다루고 추모의 시간까지 다뤘다는 점에서 고찰의 깊이를 느꼈다. 하얀 국화꽃 밑으로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이 세상에서 피해받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기아, 전쟁, 폭력, 학대, 혐오 등 세상의 어두운 면모를 상상할 수 있다. 무조건 자극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남아서 더 인상적이었다. 중간에 음악이 끊기고 몸으로만 표현하는 부분이 있는데 고요한 배경에 숨소리와 일사분란한 발소리가 무대를 울렸다, 몸으로 나오는 기운이 확고하게 느껴졌다. 희생당한 피해자들의 기억을 지워주고 눈을 감겨주며 흐느끼지 않게 감싸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지구상에 아픔이 줄어들길, 또 사라진 생명들이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분히 애써서 담은 흔적이 보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안무작에 분노와 슬픔만이 아니라 또 위로의 메시지까지 담겼다. 안하도록 추모하고 또 어루만지며 관객의 상처까지 치유해주는 시선이 담겼다.

인터미션 때 무용수로 은퇴하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그를 응원하는 영상이 상영됐는데, 그 상태로 끝내지 않고 짧게나마 은퇴식을 갖췄다. 단원들의 영상 편지가 지나가고, 한 사람씩 꽃을 건네며 인사를 건넸다. 은퇴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고, 작년에 예정됐던 공연이 엎어졌는데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고 늦게나마 자리를 마련해서 예우를 갖춰줘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규모가 크지 않은 토월극장에 띄어앉기로 평소보다 관객은 적었으나 열기는 가득찼다.

이영철 안무 <죽음과 소녀> 출처 : 국립발레단 인스타그램

평소에 자주 볼 수 없었던 몇몇 무용수들을 캐스팅했다는 게 의미 있는 부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무용수까지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기량을 뽐내도록 기회를 마련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무브먼트의 취지에도 맞겠다. 남성으로 이뤄진 파드되와 여성 간의 깊은 애정과 사랑의 정서를 다룬 작품이 특히 눈에 띄었다. 남성과 여성의 파드되라는 공식에서 탈피한 작품들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 앞으로도 기존의 이성애 로맨스 규범에서 벗어난 안무작을 시도했으면 좋겠다.

이번 무브먼트 시리즈는 전부 진지한 톤의 작품이었다. 안무를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지만, 분위기를 환기시켜주는 작품이 2부에 하나쯤 더 나왔으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또 유난히 바로크 음악이 많이 사용됐다. 중복된 곡은 없었으며 동일한 시대 음악으로도 안무가의 해석과 무용수의 구성에 따라서 다른 이미지의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으나, 다음엔 음악에도 조금 더 다양성을 부여했으면 한다. 또한 뛰어난 안무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보완해서 활용해줬으면 좋겠다.

원래는 어제와 오늘로 예정됐던 이브닝 갈라를 보고 와서 한꺼번에 쓸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공연이 취소되는 바람에 일주일 묵은 후기만 올린다. 단원들의 건강과 안전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