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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파리오페라 발레단 에투알 박세은을 대하는 한국 언론의 자세

 파리오페라 발레단 박세은 무용수가 에투알(Etoile) 지명을 받았다. 누레예프 안무 로미오와 줄리엣 개막 공연 커튼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포럼에는 박세은의 에투알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글이 올라왔고, 현실이 됐다. 유일하게 에투알이 아닌 줄리엣이었던 공연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꽃다발을 많이 받은 당사자만 눈치를 못 챘다고 한다. 동료들이 온종일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줄리엣 역할에 몰입했다. 그 묵묵함은 에투알이란 결과로 돌아왔다. 에투알이란 프랑스어로 별이라는 뜻인데, 최고의 무용수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언론은 박세은에 대해 다뤘다. SNS에서도 각국 발레 팬들의 진심 어린 축하가 이어졌다. 이미 2019년부터 에투알을 고려했으나 상황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2019년 레이몬다 주역이었을 땐 발레단 파업으로 인해 공연을 올릴 수 없었고 2020년엔 팬데믹으로 공연이 전면 취소됐다. 현장 공연이 재개된 첫 공연에서 동경하던 무용수였던 오렐리 뒤퐁 감독의 제안으로 에투알에 지명됐으며 장점을 열 가지도 넘게 들었다니 영광스럽고 의미 있는 일이다.

박세은 외에도 많은 한국인 무용수가 해외에서 활약 중이다. 2000년대부터 유수의 국제 콩쿠르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는 건 물론이고, 해외 컴퍼니에서 인정 받으면서 무대에 선다. 무용을 비롯한 문화예술 전반에 큰 관심이 없는 나라답게 기사가 뜨는 경우는 드물다. 나오더라도 반응이 약하다. 그러나 박세은의 경우엔 좀 특별하다. 로잔 발레 콩쿠르 1위 때부터(이미 2년 전에 1위를 한 김유진 무용수가 존재하는데도!) 언론에서 새로운 천재라며 주목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일본 발레 만화 스바루 현실판 주인공이라며 글이 올라와서 꽤 화제가 됐다. 역시나, 기사가 하나둘씩 나왔다.

https://youtu.be/Oqfn3flGXoo

로미오와 줄리엣. 파트너는 작년 온라인 스트리밍에서 에투알로 지명된 폴 마르크.

서론이 길었다. 오늘은 한국인들이 해외에 나간 자국민 예술가를 다루는 방식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국 기자들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몇몇 제목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연아 세계 제패 같은 사건, 토종 박세은, 352년 역사 최초, 동양인 최초, 아시아 출신 최초, 파리의 여왕, K발레 열풍, 한국 발레리나 고생의 맛, 종주국 프랑스에서 별 달다. 3페이지 정도의 기사가 나왔는데 타이틀이 대부분 이 모양이다. 당일엔 다큐멘터리가 나오면 어떨까 싶었으나, 깔릴 내레이션을 상상하니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2007년 로잔 발레 콩쿠르 때와 달라진 게 없는 시선이다. 그 시절 언론은 토종 발레 소녀 세계를 석권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1위에만 주목하느라 3위였던 김채리는 상대적으로 조명을 못 받았다. 그 이후 잭슨 발레 콩쿠르, 바르나 발레 콩쿠르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스튜디오 컴퍼니를 거쳐서 국립발레단 특채로 입단했을 때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비슷했다. 복사 붙여넣기 수준이다. 2000년대 후반을 지나 2010년대를 거쳐서 2021년이 된 지금, 언론에서 박세은의 성취를 조명하는 시선은 달라진 바 없다.

한국 언론이 발레 기사를 다루는 유형을 살펴보겠다. 우선, 몇 대 발레단. 이 유구한 발레단 줄 세우기는 어느 발레단에서 스타가 나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강수진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활동할 땐 당연히 그 발레단이 세계 3대, 또는 4대나 5대 발레단이었다. 서희가 수석 무용수로 승급했을 땐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가 영국 로열과 파리오페라와 함께 3대 발레단이었다. 그런데 마린스키 발레단을 뺄 수 없다. 수석 무용수 김기민이 내한할 땐 볼쇼이를 끼워서 러시아의 자존심 5대 발레단이 된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이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단이 내한했을 땐 갑자기 3대 발레단 목록이 바뀐다. 도대체? 몇 대 발레단은 누가 만드는 걸까? 그 발레단의 위상이 얼마나 굉장한지 강조하려면 필수인 걸까? 러시아 3대, 미국 3대까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서 검색해보니 진짜 있다!

https://youtu.be/yj6m7Do1zL0

박세은 김기민 유니버설 발레단 라 바야데르 3막. 2010년 공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발레단에서 스타가 됐다!

또 하나는 강수진 키즈다. 강수진에게 발레를 배운 적 없어도, 강수진 영향으로 발레를 시작한 게 아니라도, 큰 상관은 없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리나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박세은 역시 강수진 키즈로 언급되는데, 주니어 때부터 30대가 된 지금까지 여전히 키즈다! 강수진과 박세은 사이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군다. 한 번 정도는 2000년에 파리오페라 발레단에 입단해서 기틀을 다진 김용걸 키즈나 박세은의 롤모델이었던 김지영 키즈라고 불러줄 법도 한데 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 그 이름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뇌리엔 한국 발레=강수진이 박혔다. 아예 한국 발레를 창시했다고 믿는 게 분명하다.

심지어 접점조차 없는 타 분야의 유명인과 비교하기도 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기사에 남자 박세은이다, 클래식 음악계의 박세은이나 다름없다, 쇼팽 콩쿠르 1위는 로잔 콩쿠르 1위에 맞먹는다, 박세은 어머니가 피아노 교사라 박세은도 피아노를 배웠으니까 평행우주인 셈이라고 쓴다고 치자. 얼마나 우습겠는가! 물론 이런 생뚱맞은 기사는 본 적 없으나, 발레가 피아노보다 메이저 장르였으면 나오고도 남았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클래식의 대중화보단 대중의 클래식화를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발레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이와 비슷하게 뜬금없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김연아 선수가 물리치료 받는 곳에 박세은 발레리나도 다니고, 끈기와 의지를 가진 연습벌레 노력파이며, 부모의 지지도 비슷하고, 일반인 언니 한 명이 있고, 갸름한 얼굴형이 닮았으니 천재끼리는 통한다는 결론이었다. 발레가 더 인지도 높았으면 김연아가 피겨계의 박세은이었을 수도 있겠다. (참고로 박세은이 김연아보다 일찍 태어났다.) 이번에도 역시 김연아를 끌어들이는 기사가 떴는데 댓글 반응이 엉망이었다. 쓸데없는 비교 탓에 애꿎은 박세은만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발레 자체를 폄하하는 반응도 보였다. 아, 내가 잠시 2000년대 후반으로 돌아갔나 싶을 만큼 예나 지금이나 상황이 똑같다!

조선일보에서는 발레단의 등급을 카스트 제도라고 일컬어서 논란이 일었다. 파리오페라 발레단은 카드리유-코리페-쉬제-프리미에 당쇠르-에투알로 나눠지는데 역할에 따른 차이다. 이를 태생적으로 차별받는 카스트 제도에 비유하는 건 옳지 않다. 그리고 군무를 담당한다고 해서 신분이 낮다고 보기도 어렵다. 파리오페라 발레단의 많은 무용수가 카드리유로 은퇴하지만, 무대를 채웠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파리오페라가 여타 발레단과 다른 명칭을 쓸 뿐, 규모 있는 발레단엔 구분이 존재한다. 국내 역시 코르드 발레-드미 솔리스트-솔리스트-수석 무용수로 등급을 나눈다. 자극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서도 박세은의 업적을 알리기에 충분하다.

https://youtu.be/KX-yvGYK8Bo

로잔 발레 콩쿠르 당시 감자티 바리에이션. 다른 작품은 지젤 패전트였는데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큰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일본 만화를 한국이 이룬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내가 우려한 일이다. 박세은이 스바루 실사 찍는단 글은 2013년 정도부터 올해까지 수도 없이 스크랩됐다. 흥미 요소로 만화를 언급할 수는 있다. 문제는 업데이트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2016년 프리미에 당쇠르(1무용수)로 승급했으나 글은 처음 쓰인 시기의 쉬제 등급에 머물렀다.  새 글 역시 만화에서 못 이룬 에투알이 됐단 내용이었다. 영상은 첨부되지 않았다. 현재 박세은이 어떤 무용수인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은 채 순전한 국뽕으로만 소비됐단 증거다.

주인공 스바루는 고열에 시달려서 기권을 권유받으면서도 로잔 콩쿠르에서 1위를 한다. 박세은도 독감과 골반 통증 상태에서 1위를 했다. 클래식 작품이 스바루가 고른 라 바야데르의 감자티였다. 2부 MOON에서는 바르나 콩쿠르에서 1위를 하는데 박세은 역시 바르나에서 1위를 했다. 파리오페라 발레단 스바루를 보며 사람들은 동양인 에투알의 가능성을 논한다. 부분적 요소가 겹치는 건 맞는데, 성격은 스바루와 아주 다르다. 발레를 시작한 계기 등 디테일 차이도 크다. 일본에 대한 승리감에 도취한 댓글을 보면서 씁쓸해졌다. 왜 누구도 박세은의 감자티 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유튜브만 검색해도 나올 텐데? 내가 올려보기도 했으나 댓글이 저조했다.

https://youtu.be/6GJAM-xMdnA

바르나 발레 콩쿠르 커플 부문 돈키호테 그랑 파드되 중 코다!

https://youtu.be/CIWuefS-XjE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파리오페라 공식 채널에 가면 박세은의 로미오와 줄리엣 클립이 있으나 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누레예프 안무의 특징이 무엇인지, 작곡가인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어떤지, 클래식 발레와 드라마 발레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석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춤을 좀 보고, 춤에 대해서 말했으면 좋겠다. 잘 몰라도 상관없고, 막상 보니 취향이 아니라도 괜찮다. 어차피 예술 감상은 주관적인 느낌으로 시작하니까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박세은의 줄리엣! 이 채널에 들어가면 다른 영상도 볼 수 있다.

강수진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처음 진출했을 땐 해외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다. 그 발레단이 어떤 작품을 주로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신기하게 바라본 시절이었다. 한 사람에게 영웅 서사를 몰아주고 찬양하면서 개인의 성취도 국가의 성취로 치환하던 때의 감성은 이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강수진을 존경한다는 대다수가 그의 춤을 제대로 본 적 없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강수진은 현역 때 한국에 자주 오는 무용수였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가까이에서 춤을 보고도 남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춤이 아니라 노력해서 망가진 발 사진에 감동하고, 토크쇼 방송에서 본 이야기만 반복한다. 그래서야 입담 좋은 예능인 팬과 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클래시컬 스타일인지, 리리컬한지, 아니면 비르투오소형인지, 어떤 작품으로 무대를 서는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국위선양에만 주안점을 둔다. 대표작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그저 상징적인 이름으로만 남겼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분리하자는 게 아니다. 그 단계에만 머무르지 않아달라는 소리다. 어떤 개성을 지닌 예술가인지, 그가 소속한 컴퍼니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는 과정으로 넘어가고도 남을 시기다. 예전과 달리 정보를 알아보기 쉽다. 직접 보는 공연보단 부족하지만, 고화질 영상을 찾아볼 수도 있다. 박세은을 비롯한 다른 무용수를 강수진 또는 김연아에 비교하는 행위를 싫어하는데, 언젠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었기에 나도 부득이하게 언급하고 말았다. 심지어 BTS 예시도 나왔다. 아무리 발레가 비인기 장르라고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1등, 최고, 최초, 순수 동양인 정체성에 집중하지 않고 기사를 뽑아내는 법은 없는 걸까? 황당한 기사의 홍수 속 괜찮은 칼럼 하나를 발견해서 공유해본다.

링크 : http://www.thep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48

 

파리오페라 발레단은 예술을 성숙하게 향유할 만한 나라에서만 공연하는 단체로 유명하다. 아무리 개런티를 높게 줘도 자격이 없으면 무대를 서지 않는다. 이쯤이면 한국에 오지 않아도 할 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세은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찬양하며 소유할 자격이 없다. 부디 이제는 인식이 좀 달라지길 바란다. 박세은을 주역으로 파리오페라 발레단 내한이 성사될 날이 올까?

https://youtu.be/wAW2K1Sayqs

한예종 인어공주 중에서. 영재원에서도, 대학생 때도, 국립발레단에서도, 공연마다 눈에 띄는 무용수였다.

경사스러운 일에 불평불만이 길어졌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정단원 제의를 직접 찾아가서 정중히 거절한 뒤 파리오페라 연수단원부터 차곡차곡 올라왔기에 더욱더 뜻깊다. 발레학교 출신이 아닌 그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자 도전이었으리라. 꾸준한 태도가 이룬 성과다. 마지막으로 자랑을 하나 하겠다. 2005년 만 15세의 박세은을 세종문화회관 1층에서 봤다. 동아무용콩쿠르 본선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로즈 아다지오를 여유롭게 소화할 때 전율이 흘렸다. 매끄러운 턴, 세련된 마무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바로 직감했다. 올해의 금상이겠구나! 그 이후로 박세은이 나오는 대회나 공연은 시간만 맞으면 꼭 보러 갔다. 성장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한국에 오면 쫓아갔고 1초라도 놓칠세라 초집중해서 눈에 담았다. 언젠가 이 공연들을 맨눈으로 봤단 사실을 크게 자랑할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내 예감대로 이뤄져서 매우 기쁘다.

박세은이라는 무용수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함께 나이를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최상의 모습을 보이고자 최선을 다하는 무용수에게 합당한 결과다. 에투알은 아예 대우가 달라지는 위치이기에 아무나 올리지 않는다. 공연 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작품을 교섭할 수 있으며, 브랜드 협찬도 들어온다. 그저 기술만 뛰어나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논의 끝에 이사진이 동의해야 하고, 단원들과의 조화로운 관계도 필요하다. 어떤 찬사보다도 춤에 감동받았다는 표현을 좋아한다는 박세은이 앞으로 그 자리에 걸맞은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오래 사랑받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