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lemence #B5AEF7

유니버설발레단 돈키호테 감상 : 요절복통 시트콤 열정 넘치는 희극 발레

돈키호테는 언제 봐도 유쾌한 희극 발레 작품이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에 딱 어울리게끔 활기차다. 초심자에게 보여줬을 때 반응이 긍정적인 클래식 발레 중 하나다. 특히 발레에 편견을 가진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광장 배경으로 따뜻하고 열정적인 색채가 넘쳐나서 흥겹다. 제목은 돈키호테지만 원작과는 매우 다르다. 돈키호테는 조역이자 두 주인공을 엮어주는 매개체이고 소설과 달리 가볍고 신나는 분위기로 이어진다.

공연을 예매할 땐 캐스팅 고민을 오래 한다. 신선한 신인 데뷔를 볼 것인가, 상상 가능하지만 그만큼 편안한 감상이 보장되는 페어를 볼 것인가. 체력과 시간과 통장의 3박자가 허락한다면 원하는 캐스팅을 다 보는 게 이상적이지만, 그런 순간은 얼마 없다는 게 문제다. 일단 6월 4일 7:30분 손유희-콘스탄틴 노보셀로프를 예매했다. 손유희의 키트리를 예전에 재미있게 봤고, 콘스탄틴 노보셀로프(통칭 코스챠) 바질은 TV에서 방영된 영상으로 봤는데 코믹하고 귀여운 바질이었다. 1회로 끝내기 아쉬운 마음에 미지수의 재미를 공략하며 파릇파릇한 십대 신인 김수민의 데뷔로 6월 5일 2시에 2회차를 찍었다. 또 네이버 TV 라이브로 대박 케미 홍향기 이동탁의 막공을 보며 방구석 1열 3회차로 마무리했다.

돈키호테는 고난도 리프트가 많은 작품이다. 남성 무용수의 역량이 중요하다!

1층에서 첫 공연을 봤을 땐 가깝게 잘 보였고 2층으로 올라갔을 땐 전체적인 모습이 잘 보여서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우선 금요일 저녁 첫 공연은 2018년 이후 오랜만에 보는 돈키호테라 더 즐거웠다. 아, 이런 흥미진진한 맛에 돈키호테를 보는 거였지. 밝은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코믹한 춤이 이 시기에 딱 어울린다. 손유희 키트리는 약 10년 전이 마지막 기억인데(와, 세월!) 그 시기엔 어린 만큼 내일이 없는 양 몸을 사리지 않고 파워풀했다면 지금은 신중하게 움직이며 연기 디테일에 성심껏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오랜 간격을 두고 보니까 감회가 새롭다.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서 애교 많고, 마을 사람들에게 평판 좋으며 신뢰하는 친구가 많은 선술집 딸. 새초롬하게 밀고 당기고 토라졌다가 귀엽게 웃고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다리를 휙 꼬는 리액션은 이른 저녁에 방영하는 홈드라마 주인공이 연상됐다.

키트리 역 손유희 무용수. 코르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케이스인데 어디서도 눈에 띄었다.

동일한 역할을 보더라도 상황과 연령대에 따라서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건 신기한 일이다. 손유희는 미국 툴사 발레단으로 이적했다가 돌아와서 쌍둥이를 출산하느라 무용수로 공백이 생겼는데, 다시 무대에서 본다는 자체로 반가웠다. 지난 20년간 출산 뒤 컴백해서 연륜 있는 모습을 보여준 여성 무용수들의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몸을 쓰는 여성 무용수에게 출산은 꽤 치명적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다시 커리어를 이어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분위기가 형성된 게 다행이다. 작년 오네긴에서 봤을 때 지적허영심 높고 타인과 고립을 원하며 사색적인 타티아나로 인상을 남겼는데, 돈키호테에서는 통통 튀며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줬다. 천연덕스러운 마임, 뾰루퉁한 표정, 질투를 유발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자그마한 체구로 큰 친구들 뒤에 쏙 숨었을 때의 깜찍함! 버릇없는 딸 연기도 착 달라붙는다.

이번 공연은 코스챠의 재발견이었다. 최근에 주로 부드럽고 유약한 캐릭터로 만났다. 내성적이고 비관적인 지그프리드 왕자라거나, 낭만적인 음유시인 렌스키라거나. 5월 군포 해설 백조 때도 왕자였다. 당시 리프트가 뛰어나 기대치가 더 커졌는데, 바질까지 잘 소화할 일인가! 매사에 태평하고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와 리드미컬한 움직임, 또 솔로마다 보여주는 화려한 턴 테크닉이 눈을 사로잡았다. 돈은 없지만 이발해서 많이 벌어오겠다는 마임이 시원시원했고 자살 소동도 웃음을 자아냈다. 철딱서니 없고 능글맞고 까불까불한 모습, 섬세한 팔 각도와 능수능란한 기교가 잘 안배된 바질이었다.

김수민 키트리 캐스터네츠 솔로 중 그랑 씨쏜느 (grand sissonne) 위대한 무용수 이름을 빌려와 일명 플리세츠카야 점프로도 불린다. 캐스터네츠를 쥐는 손 모양.


이튿날은 자신만만하게 나와서 무대를 즐기는 주니어 김수민의 키트리를 만났다. 몇 년 사이 대회장에 갈 때마다 봤던 학생인데, 매번 발전하는 모습이 괄목할 만하다. 테크닉 뛰어나니 표현을 발전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표정이 살아나고, 다 좋은데 조금 긴장한 듯해 아쉽다고 생각하면 여유가 생기고, 착지할 때 다소 딱딱해 보여서 걸렸는데 어느새 소리 없이 가벼운 점프를 하고, 최근엔 당당해져 좋지만 음악성과 박자감을 좀 더 기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이번 공연에서는 음악까지 잘 타서 놀랐다. 와, 역시 어릴 땐 흡수가 빠르구나.

학생 주역을 못미더워하는 의견을 봤는데, 발레단 특성을 모르는 소리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예전에도 10대~20대 초반 주역을 파격 데뷔시켰다. 그리고 그 주역들은 거의 해외로 나갔다. 발레단 안목을 믿고 국내에서 볼 수 있을 때 보는 게 이득이다. 영스타에게 관찰되는 특징이 있다. 겁 없이 돌진하는 모습! 김수민 역시 쫄지 않고 당당하게 무대를 가지고 놀았으며 활발한 움직임으로 탁월한 테크닉을 보여줬다. 신인 데뷔는 이런 맛에 보는 것. 고등학생 나이답게 딱 상큼하고 앳된 표정인데 동작은 정확하고 안정적이다. 건강하고 패기 넘치는 키트리! 통제하려 드는 아버지와의 옥신각신 갈등도 잘 표현했다. 말 안 듣는 딸 표현이 자연스럽다. 돈키호테 꿈 장면의 둘시네아는 큰 인상을 주기 어려운 안무인데 신기하게도 이쪽이 더 취향이었다.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살리며 치밀한 테크닉을 구사한다. 3막의 고난도 테크닉인 32회전 훼떼도 눈부시게 소화했다. 중간에 부채를 활짝 펼치는 여유까지! 싱그러운 신인 데뷔다.

바질을 맡은 간토지 오콤비얀바는 파트너로 최선을 다해서 어린 무용수 데뷔를 빛내줬다. 상대가 더 빛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돋보이게 만들어주며 책임감 있는 서포트를 했기에 더 마음 놓고 날아오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또 무용수의 나이를 고려했는지 전체적인 스킨십을 담백하게 조절했다. 바질은 물론이고 키트리에게 구혼하는 가마슈도 마찬가지였다. 돈키호테는 그렇게 수위가 높은 작품이 아니고 연기 중의 하나라지만 청소년 나이에 과도하게 느껴질 만한 안무는 지양하는 게 옳다. 또 김수민은 3막에서 다른 무용수들과 달리 빨간색이 아닌 하얀색 꽃을 꽃고 금빛으로 장식된 흰 의상을 입었는데 순수한 이미지라서 잘 어울렸다.

에스파다의 에너지 넘치는 춤! 리더십 강한 청년 캐릭터를 보여준다. 


돈키호테를 빛내는 요소인 투우사와 에스파다의 춤도 즐거웠다. 특히 강민우의 에스파다는 해사한 표정으로 시선을 뺏었다. 망원경으로 보면서 감탄! 금빛처럼 노란 의상을 입고 망토를 흔들면서 지휘하는데 와, 에스파다로만 쓰긴 아깝단 감정과 에스파다를 매번 했으면 좋겠다는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선술집 주인으로 잠시 등장한 날도 눈길이 갔다. 마치 소년처럼 해맑은 표정과 슬림한 라인이 돋보였다. 마을에 열정과 활력을 더해주는 서글서글한 청년. 아버지를 피하는 키트리를 숨겨주고, 바질이 소동을 벌일 때 물을 갖다주는 연기도 눈에 띈다. 참고로 손유희 회차엔 이현준이 에스파다였고 두 사람은 부부 사이인데 그 사실을 상기하면서 보니까 더 재미있었다. 키트리 친구를 맡은 서혜원의 화사한 표정과 매력적인 눈웃음, 빠릿빠릿한 움직임도 인상적이었다. 요정으로도 나왔는데 어디에 세워놔도 보인다. 포스 넘치는 거리의 무희, 큰 요정, 키트리 친구로 전막에 계속 등장하던 한상이도 기복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재활로 휴식을 가졌고 최근엔 출산을 하고 돌아왔는데 관록이 붙은 느낌이다. 

돈키호테의 환상 속 꿈의 세계. 사람들이 상상하는 클래식 발레 이미지에 가깝다. 요정들이 나오니까!


돈키호테의 또 다른 묘미는 2막이다. 1막과 3막은 스페인 풍 캐릭터 댄스와 화려한 결혼식이 근사하다면 2막은 정통 클래식 발레의 환상을 보여준다. 화려한 옷을 입은 집시들이 이국적인 춤을 추고 나면 돈키호테가 소설 속 모습처럼 풍차에 달려들었다가 기절해서 꿈에 빠져들고, 낭만적인 숲의 요정들을 만난다. 드림이라고 불리는 이 장면의 짜 주역은 페어리 퀸이라고도 불리는 드라이어드 퀸! 요정들의 여왕인 이가영은 견고한 발란스와 절도 넘치는 이탈리안 훼떼를 보여줬다. 흘러나오는 기품. 여왕 장인이다! 3막의 메르데세스에선 놀라운 유연성과 생명력 있는 손끝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춤을 췄다. 신장이 커서 파트너를 만나기 힘든데 장신 해외 무용수를 초청해서라도 주역을 시켜주고 싶을 정도로 개성과 무대 장악력이 남다르다.

큐피드의 오타 아리카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눈을 홀렸다. 하늘하늘한 튜닉에 작은 날개를 달고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활보하는데 얼마나 깜찍하던지! 예전에 본 일본 발레 만화에서 스마일이 특기인 주인공을 봤는데, 어느 역할을 맡아도 표정이 눈에 띈다는 설정이었다. 그 만화가 절로 떠오르는 표정이다. 1막의 세기디야나 3막의 키트리 친구들에서도 활짝 웃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으나, 잔망스러운 큐피드에 특히 적역이다. 가볍게 날아오르는 동작! 돈키호테만이 아니라 관객도 홀리는 앙큼함! 마치 공기를 가르듯이 톡톡 치고 올라오는 폴드브라에 반했다. 시선과 입 모양이 딱 개구쟁이!

https://youtu.be/KttyDJusVbg

캐스팅을 결정짓게 된 영상! 현재 출산휴가를 쓴 강미선과 코스챠 부부 페어. 2막 꿈 장면과 3막 결혼식 장면이 나온다.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돈키호테의 중재로 얼렁뚱땅 둘 사이를 승낙받은 뒤 결혼식을 올리는 3막 2장은 가장 다이내믹하다. 그랑 파드되는 갈라 단골인데, 역시 전막으로 봐야 그 분위기가 살아난다. 하객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니 축제 분위기 물씬 풍기고 판당고 춤과 키트리 친구들이 자리를 빛내주니 역시 인기인의 결혼식이라는 느낌! 갈라에선 쉽게 볼 수 없는 bridesmaid(들러리) 바리에이션도 좋다. 주체적인 춤을 보여준 사공다정의 풍부한 에너지가 기억에 남는다. 발칙한 쏘드샤와 스페인 분위기를 살리는 팔 동작, 민첩한 턴이 눈에 띈다. 쭉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공연에서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더 커다란 역할로 만나고 싶다.

홍향기 이동탁 페어 결혼식 그랑파! 향탁 커플이라고 불리는 둘은 딱 달라붙는 케미가 특징이다.

마이웨이 돈키호테 곽태경 선생님, 감초 연기 산초 판자패트릭 부르파처, 허영 부리는 졸부 가마슈의 연기도 즐거운 요소였다. 루이스 가드너와 바이르 타이비노프 모두 촐싹거리며 끼를 보여줬다. 로렌조를 맡은 김현우 선생님은 아버지 전문 객원 캐릭터 무용수인데, 상당히 긴 세월 동안 실감나는 연기로 자리를 채워준다. 어떤 딸내미를 만나는지에 따라서 부녀 조합이 달라지는 것도 흥미롭다. 손유희 키트리는 곱게 키웠는데 엇나간 장녀, 김수민 키트리는 질풍노도의 늦둥이 막내, 홍향기 키트리는 천방지축으로 자란 외동딸 대하는 느낌. 활달하고 기운찬 마을 사람들까지, 허투루 넘길 장면이 없다. 코로나 여파로 단원 숫자가 확 줄고 규모가 작아져서 이 인력으로 괜찮을까 다소 걱정했는데 충분히 풍성한 무대를 보여줬다. 여러 역할을 맡은 무용수들도 쌩쌩하게 소화했으며 관객 호응도 뛰어났다.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해서 더 박진감 넘쳤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2층 사이드 블록에서 봐도 시야가 많이 가려지지 않는 무대를 구성해서 1층 R석에서 본 첫날만큼 만족도가 높았다.

매번 달라지는 로비 캐스팅 보드와 포토존 캐릭터 설명은 성의껏 준비한 티가 났다. 키트리 입체감 대박! MD도 다양하게 잘 뽑아서 줄이 길었다. 프로그램북도 사진이 많아서 알찬 구성이다. 

네이버 TV에서 최초 후원 라이브를 진행해서 3회차는 온라인 생중계를 보며 마무리를 지었다. 믿고 보는 테크니션 커플 홍향기 이동탁 페어였는데 독보적 파트너십을 보여줬다. 딱 상상 가능한 키트리와 바질 캐릭터였다. 왈가닥 키트리와 능청맞은 바질 연기가 잘 어울렸고, 대단한 체력으로 무대를 빛냈다. 복작복작한 마을 분위기를 더 살리는 커플! 둘 다 주장이 강한 춤을 춰서 찰떡궁합이다. 홍향기는 다른 둘과 달리 그랑쥬떼가 아니라 파드부레로 등장해서 파세에 집중하는 안무를 했는데 발랄하면서 요염했다. 방구석 1열이라 망원경 없이도 표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직접 봐야 더 실감나지만, 인터미션 때 놓친 부분을 다시 볼 수 있는 건 편리했다. 다소 끊기고 생뚱맞은 게 찍혀서 아쉬웠으나, 언택트 시대에 탁월한 아이디어다.

발레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감상도 좋았다. 처음 본 사람의 후기, 재미있다는 채팅창을 보니까 역시 요절복통 시트콤 같은 돈키호테는 입문용으로 최고란 생각이 든다! 부채로 감정표현을 보여주고, 탬버린 캐스터네츠 등 친숙한 악기가 소품으로 등장하기에 흥이 많은 한국인이 즐기기에 적합하다. 상반기 스케줄이 없어서 10개월만의 서울 정기공연인데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