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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피구왕은 되고 싶지 않아!

 초등학생의 친구 관계에 얽힌 복잡미묘한 심리를 손에 잡힐 듯 섬세하게 다룬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은 체육 시간의 피구 장면으로 시작해서 피구 장면으로 끝난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집이 작고 소극적인 '선'은 피구에서 그 누구도 같은 팀에 끼워주지 않아 배제되는 아이다. 매사에 눈치를 많이 살피는 것에 비해 눈치가 없는 편이라서 친구를 못 만든다. 방학식에 전학생 '지아'를 만나서 마음 맞는 친구가 생긴 줄 알았는데 웬걸, 잘 나가는 아이인 '보라' 무리에 끼면서 모른 척한다. 지아와 단짝으로 지내고 싶은 선, 학교라는 사회에서 권력을 지닌 무리에 소속하고 싶은 지아. 돌고 도는 따돌림.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은 지아가 금을 밟았다고 주장한다. 소통에 서툴렀던 선의 용기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와 결이 비슷하지만 다른 소설이 있다. 황유미 작가의 소설집 <피구왕 서영>이다. 표제작을 비롯해 집단 속의 위태로움과 불편함을 담은 단편들로 이뤄진 책이다. 피구를 마치 먹이사슬 같은 인간관계에 빗댄 피구왕 서영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서영'은 공상을 즐기고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초등학생이다. 튀지 않고 무난하게 지내고 싶었던 전학 첫날, 우연히 교실의 권력 최상위층인 '현지'와 편을 먹고 피구를 하게 된다. 그리고 피구를 '잘' 하는 아이로 인정받는다. 사실 서영은 반에서 겉돌지만 자신처럼 책을 좋아하는 '윤정'과 기질이 잘 맞는데도 선뜻 친해지기 어렵다. 이 책의 피구는 더 노골적이다. 너 때문에 졌다는 비난을 서슴없이 한다. 서영은 체육 시간의 피구를 못 즐긴다. 피구왕 서영이라고 불리지만 피구 노예 서영 같다고 생각한다.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인정받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며, 감독관이 존재하는 피구. 서영에게 피구왕 타이틀은 부담스럽다.

영화 <우리들> 포스터

종종 학생으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꿈 속의 난 시간표에 들어간 체육 글씨를 노려보며 빠질 방법을 연구한다. 꿈에서 보는 운동장은 유난히 광활하고 울퉁불퉁하며 공은 더 단단하다. 꿈은 항상 비슷하게 진행된다. 교실에 숨어보고, 큰 나무나 창고처럼 숨을 곳을 찾아보지만 허사로 돌아간다. 공을 놓쳤다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이 돌아온다. 날아오는 공,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공, 휘날리던 모래의 찝찝한 기운, 등 뒤로 재촉하며 원망하는 목소리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예전의 체육 수업은 무성의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만족할 만한 체육 수업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점수를 매기는 실기 시험을 앞둔 때가 아니면 으레 피구나 발야구 시간이었는데, 교육 과정에 저촉되는 일이었는지 학급일지에는 '체력 단련' 등 다른 내용을 써야 했다.

공으로 때리고 맞는 운동을 제대로 된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난 피구란 게임에 깊은 저항감을 느꼈다. 피구만 하면 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운동신경이 둔한, 피구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열심히 했는데 공을 놓치거나 못 피한 아이들은 쉽사리 비난의 대상이 됐다. 고학년이 될수록 더 심해졌다. 피구에서 지는 게 세상 멸망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주로 타깃이 되는 아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작은 키, 약한 몸, 소심한 성격 등. 내가 미움받는 대상이 아니더라도 그 공기 자체를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은근히 튀기 좋아하고, 이래저래 눈에 띄는 아이였기에 체육 시간에만 존재감 약한 투명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반항을 했다. 구기 종목은 대체로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그 유명한 슬램덩크 만화까지 안 봤을 정도다. 월드컵이 열풍이어도 관심이 없었다.) 피구가 제일 최악이었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폭력적인 게임이라서 더 정이 안 갔다.

피구왕 통키! 당연히 이 만화도 안 봤다. 이 만화 때문에 피구 유행이 시작된 걸까?

단 1회도 피구에 진심으로 임하지 않았다. 공격이든 수비든 룰에 맞게 수행한 적이 없다. 처음으로 맞아서 나가버리고, 공이 나한테 다가와도 잡지 않았다. 나 혼자만 금 밖에 나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을 땐 굴러가도록 뒀다. 누군가 타박해도 대놓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서 시간을 때웠다. 공보다 내 걸음이 느렸는데도 시간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1초가 1분이어서 10분이 휙 지나가고 끝나는 종이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금이라는데, 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다. 공이 멈추길 기다렸다가 또 천천히 다가가서 꾸물대면서 주저앉고 열을 센 다음에 공을 잡고 또 열을 세고 천천히 일어나서 내가 걸을 수 있는 한 제일 느린 걸음으로 돌아온 다음에 상대편 팀에서 공을 잘 받는 아이에게 대놓고 던져줬다. 쓰다 보니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나 싶은데 그 시점엔 진짜 진지했다.

-피구 이긴다고 더 좋을 것도 없고 진다고 세상 안 끝나. 유치한 짓거리에 왜 목숨을 걸어?

이렇게까지 명백한 고의로 피구를 망쳤는데 크게 따돌림을 당하진 않았다. 원래 좀 이상한 애라서 말이 안 통하니까 두자는 생각이었을까? 룰을 잘 몰라서 실수하는 줄 알았는지 다시 알려주기도 하고, 제대로 하라며 타박하는 급우들도 있었지만, 몇 번이고 무시하니까 대부분 포기했다. 일부러 제대로 하지 않는 나보다 나름대로 애쓰는데도 자꾸 공을 놓치고 끝까지 피해보려고 뛰는데 결국 맞아서 게임을 지게 만드는 쪽이 더 크게 비난을 받았다. 더 만만한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는 건가? 애초에 막 살면 나중에는 아무도 안 건드린다는 교훈을 어린 나이에 얻은 셈이다! (?)

당연히 체육 선생님들은 날 괘씸하게 봤다. 그래도 몇 번은 운동신경이 너무 없어서 공을 무서워하는구나 넘겨주신 것 같은데, 다른 실기 시험을 보고 나면 반응이 변했다. 난 달리기만은 꽤 빨라서 높은 점수가 나왔다. 특히 오래달리기는 반에서 항상 5등 안에 드는 기록이었다. 몇 번은 2등이나 3등을 해서 육상대회 계주 선수 후보 선발전까지 올랐다. 평균대나 윗몸일으키기도 그럭저럭 괜찮게 하는 편이었다. 모든 운동에 취약하다면 모를까, 의외로 몇몇 종목은 상위권이니까 배신감을 느끼신 모양이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건 아니고 공 겁내는 것도 많긴 한데 유난히 피구가 더 싫다고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계속 비슷한 과정을 겪고 나서 피곤해진 내 선택은 지금 생각해보면 또 비상적이었다. 시간표에 체육이 들어간 날은 어떻게든 빠질 궁리를 했다. 1~2교시면 어쩔 수 없이 나갔지만, 5교시 이후면 급식만 먹고 혼신의 연기로 아픈 척 조퇴증을 얻어냈다. 바로 집으로 갈 수는 없었기에 PC방으로 직행했다. 중학교 3학년의 일이다.

당연히 체력은 점점 깎였다! 대학생 때도 체육대회마다 도망쳤다. 아, 왜 대학에서도 피구를 하는데! 친구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체력 관리의 필요성을 느껴서 운동 시설에 등록할 때도 난 체육을 배우는 느낌이 나지 않으면서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보면 걷기나 춤 종류만 남는데 강도가 높아지면 꾸준히 지속할 맘이 사라진다. 피구 때문에 체육 시간이 싫어지고, 체육 선생님들과 갈등을 빚은 탓에 운동을 배우는 일에 거부감이 생기고, 그 상태로 몸을 잘못 쓰면서 살다가 뼈가 망가졌다는(바로 이전 글 참고) 슬픈 결론에 이르렀다.

최근 재활 운동을 했더니 몸이 놀랄 만큼 좋아지고 뭉친 근육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치료도 생각보다 훨씬 빨리 중지했다. 지금까지 방법을 몰랐을 뿐, 운동을 조금만 하면 확 달라질 몸이고 잘 따라 해서 벌써 변화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왜 본격적인 운동을 싫어하는지 반추해봤더니 그 근원엔 피구가 있었다. 정확히는 피구를 통한 인간관계의 폭력성. 쓸데없는 승부욕을 드러내면서 집착하는 분위기가 싫고, 피구 때문에 감정 상하고 집단에 문제가 생기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방임하는 선생님들에게도 실망했다. 좀 긍정적인 경험을 많이 했으면 달랐을까? 강압적인 선생님과 아이들의 잔혹성이 왜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을까?

이 글에 언급된 단편집들. 초등학생이 주인공이지만 보편적 인간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나에게 체육은 억지로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다. 기준점에 맞지 않는 아이들이 열외당하고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서 괴로워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왜 운동을 해야 건강해지는지, 운동에 취미를 붙이면 왜 좋은지 진지하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식이면 대학 가기도 전에 병에 걸린다거나, 모난 돌처럼 굴면 사회생활이 힘들어진다는 협박 말고, 학교만 졸업하면 체육 같은 건 평생 안 하고 맘대로 살아도 되니까 지금만 적당히 맞추라는 소리도 말고, 좀 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최나미 작가의 단편 동화집 <셋 둘 하나>에도 피구를 거부하고 그 시간에 운동장 열 바퀴를 뛰는 '선우'라는 아이가 나온다. 선우는 차라리 남자애들이랑 발야구를 하고 싶다고 우겼으나 선생님은 규칙이기 때문에 고집을 받아줄 수 없다고 거부한다. 선우의 대사를 옮겨보겠다. “피구는 스포츠가 아냐. 공으로 사람을 맞히면서 승부를 내다니. 누가 그런 무식한 운동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이건 신념의 문제야.”

창작물에서 피구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볼 때마다 깊게 공감하는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나만 피구에 거부감과 공포를 느낀 게 아니었다니! 피구를 즐길 수 없었던 친구들을 떠올려본다. 선 밖에서 불합리함을 느낀 사람들이 자라나서 멋진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낸다.

언젠가 초등학교에 계신 선생님이 쓴 글을 읽었다. 모두가 체육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운동을 개발하셨는데, 피구 수업의 부정적인 기억을 안고 사는 입장에서 정말 응원하고 싶은 프로그램이었다. 색다른 수업을 들으면 나처럼 운동 자체를 외면하는 아이들이 줄어들겠지? 이런 시도가 지속되어서 생활 속 운동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