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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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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떡하나요』(연정, 발코니 출판사) 지금은 연이 끊어졌지만, 술을 함께 마실 정도는 되었던 사람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시는 이제 그만 쓰고 에세이를 쓰세요. 대체 시 따위를 왜 쓰는 거예요? 당신은 세상을 향해 할 말이 많잖아요.” 코로나 19가 있기도 한참 전의 일이니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겼던 깊은 상처도 거의 아물었다. 하필 그때쯤부터 나는 계속 내가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지적을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가?’하고 생각해봤고, 부정도 해봤지만 이제 내가 말이 많은 사람이 맞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말이 많은 것은 장점이라기보다 단점으로 작용하기 쉽다. 어딘가 허술한 인상을 주거나 처신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곤 한다. 부담스럽게 너무 가깝거나 깊게 접근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해! 4월 8일 영원한 우리의 봄.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코끝이 시큰해지네. 걱정하지 마. 슬프거나 아파서 우는 건 아니니까. 그냥, 많이 그립고 보고 싶어서 그래. 너도 우리가 많이 보고 싶지? 올봄에는 꽃들이 한꺼번에 피었어. 진달래랑 개나리랑 매화랑 목련이랑 벚꽃... 모두모두 한꺼번에 펑펑 터졌어. 너는 아마 그걸 보고 나랑 같이 웃었을 것 같아. 한편으로 기후위기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눈 앞의 아찔한 꽃천지에 너랑 나랑 그렇게 어설프게 웃었을 거야.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려하면서 말이야. 라디오에서 너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플라스틱을 줄이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될까, 우리 같이 고민해보자면서 진지한 목소리로 제안했겠지. 그리고 환경보호를 주제..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고요? -제인 오스틴, 《맨스필드 파크》 제인 오스틴의 여성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것은 캐릭터를 묘사하고 다루는 제인 오스틴의 뛰어난 능력뿐만 아니라, 소설의 스토리와 주제에 맞는 성격의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선택하는 감각과 지성이 드러난 결과이다. 제인 오스틴이 페미니즘적인 면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면모다. 여성들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 온갖 모습으로 등장하며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간다. 외부인도 아니고, 욕망의 대상도 아니고, 남성 영웅에게 주어지는 트로피도 아닌 주체로서 자신의 욕망과 지성과 원칙을 가지고 살아 숨 쉰다. 제인 오스틴의 여성 주인공들 중에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를 꼽으라면 단연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이다. 200여 년간 이 작품과 이 작품의 주인공은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극과 극의 평..
제인 오스틴 팬픽 쓰기 트위터 계정 “뽀삐네 책묶음”에 올라온 “2021 여성 클래식 다시쓰기 온리전” 참여작가 모집글을 보고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덜컥 신청서를 냈다. 뽀삐네 책묶음은 “여성의 작품으로 세계문학을 다시 읽는 독서 프로젝트”계정이며, “매 일요일마다 한 주간 읽을 분량의 책묶음이 업로드”되고 있다. 다독을 자신하는 독자들은 이 계정의 책묶음을 쫓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고, 나처럼 눈이 느린 이들은 그동안 몰랐던 여성 작가들의 이름이라도 눈에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이 계정을 따르다보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여성 작가들이 있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많은 것이 느릿한 나지만, 글 읽는 것마저도 느린 나는 업데이트되는 책묶음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과 작품명이라도 볼 수 ..
코로나19가 없는 병원 새벽, 여섯 시가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불쾌하고 희미한 꿈인 줄 알았던 그것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몸을 웅크리고 신음했다. 평소엔 상상도 못 할 복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응급실에 갈까, 내 발로 걸어 갈 수나 있을까, 구급차라도 불러야 하나, 온갖 생각을 다 들고, 곁에 자고 있는 배우자를 깨울 것인지 말 것인지도 결정할 수가 없었다. 평일이었고, 배우자는 곤히 자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한 조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결정부터 하고 깨우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몰래 조심조심 끙끙 앓고 있었더니 고양이들이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주변을 맴돌며 내 손발과 얼굴을 핥아가며 야옹거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한 것은 코로나19 때문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병원들이 정상적으로..
어깨동무하고 발로 화이팅하기 - 예능 프로그램 '미쓰백'을 보며 “밥블레스유” 성공 이후, 여성 출연자들을 전면에 세운 예능 프로그램들이 많이 제작, 방영되고 있다. 식사할 때 틀어놓고 보기엔 예능만큼 좋은 것이 없다. 종류도 분위기도 다른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챙겨보며 울고 웃다 보면 마음을 짓누르던 것들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어느 프로그램이 ‘최애’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하나 다 좋아서 매일이 기다려진다. 지난주 6회째 방송된 “미쓰백”도 그중 하나다. 케이블 채널 MBN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2010년 전후 데뷔하고 활동했던 여자 아이돌 그룹 멤버들에게 경연을 통해 “인생곡”을 가질 수 있게 해 주고 그 곡의 수입을 50% 보장해주는 계약까지 변호사를 통해 맺어주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경연을 통한다고는 하지만 ‘탈락’ 제도는 없다. 개인의 삶과..
코로나 시대의 명절을 보내며 올 추석은 어떤 사람들에겐 일말의 자유를 주었을까? 굳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억지로 만나야 한다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음식을 잔뜩 해야 한다거나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거나, 명절이면 명절이라는 이유로 강요되었던 것에 실낱같은 선택권이 생겼을까? 코로나 시대이니 말이다. 나는 코로나를 핑계로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쩜 나는 이렇게나 하지 말라는 건 꼭 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를 가졌을까. 올 추석만큼 엄마가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집콕’을 했다. 너무 집 안에만 있으면 사람이 축축한 이끼 같아져서, 집 앞에 잠깐 산책 나갈 때도 마스크와 손소독제로 무장을 하고 다녔다. 반려인이 올해는 전을 부쳐줬다. 명절마다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느라 그럴 일이 없었는데...
시 좀 써라~ 김행숙 시인의 새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를 훑어봤다. 책을 정독하기 전에 미리 훑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드라마나 만화책이나 영화도 미리 시놉시스와 엔딩까지 모두 찾아보고, 감상 포인트를 알고 나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스포일러 완전 환영!”이다. 시를 읽기 시작한 2016년부터 김행숙 시인은 언제나 좋아했다. (나는 2016년 전에는 시집을 굳이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새 시집이 나오다니! 신난다! 시는 한 편씩 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역시 시집으로 나온 것을 읽는 것이 백만 배 좋다. 시집을 기획하고 시를 시집 안에 배치하고 구성하고 ... 표지까지 고르는 그 과정을 열심히 따라가며 시인을 열렬히 찬양(!)할 수 있으니까! 특히 시인의 역대 시집을 차례로 살펴보는 일은 더욱 즐거운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