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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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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추상 “흐리거나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화창하게 맑은 날씨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일관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의 마음은 간사해서 오래도록 비가 오면 맑은 날이 그립고, 땡볕 아래를 걷는 중에는 ‘비나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이왕이면 눈이 펑펑 내려버렸으면!’ 생각하곤 한다. 그래도 이번 여름에 길게 이어진 빗속에서는 많은 이들이 밝은 해를 어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올해 40일을 넘겨 계속 비가 왔던 것은 환경 파괴로 인해 기후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절실히 느껴지는 위기감에 나 역시도 일회용품과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낯 모를 생명들이 함부로 희생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원래 나는 여름의 장..
찐으로 여자를 좋아하기 며칠 전 친구 커플과 함께 더블 바캉스를 다녀왔다. 코로나 시대라 망설여졌지만, 우리들에겐 휴식이 절실했다. 궁리 끝에 완전 독채인 펜션에서 타인과의 접촉을 금하고 우리끼리의 위생조치도 철저히 하며 짧게나마 일박이일을 놀고 쉬었다. 2인 가족 둘을 이루는 4인이 모두 여성애자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우리들의 관심이 쏠려 있던 것은 레드벨벳 아이린&슬기 듀엣의 유닛 활동이었다. 우리 중 한 사람이 오랫동안 ‘걸그룹 행복 추진 위원회 회장님’이었고, 나도 최근 그 위원회에 전무이사쯤으로 진입하였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배부르게 먹고 쉬어가는 타이밍에 잠시 유튜브로 그 듀엣을 같이 보자며 다들 늘어졌다. 그리고 2시간은 순삭 되었다. “몬스터” 뮤비는 종류별로 5번씩은 돌려본 것 같다. 거기에 링크로 붙..
세상의 비타민이 되라 말씀하셨지 장래희망은 ‘에이즈를 고치는 과학자’였다. ‘의사’가 아니었던 것은 순전히 무지와 반항심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법관이나 의사가 되길 간절히 바라셨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지만 글쎄, 법관이나 의사가 되어야만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나?’하는. 그중에서도 왜 하필 ‘에이즈를 고치는’이라는 목적의식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 어린 시절 읽었던 책 속에서 에이즈는 ‘불온한 질병’이자 ‘불치의 질병’으로 묘사되었고, 어린 나는 불온함의 대가가 불치의 질병이라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어떤 불온함이든 말이다. 결국 그 아이가 커서 사회의 ‘불온 분자’가 되었으니 참 선견지명이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20대엔 가족 사업에 노동력을 동원당했고, ..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2013년 말부터 나는 대인기피증을 겪기 시작했다. 한동안 삶이 고여 있었다. 13년 가을에 만난 애인 외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나는 28세에 죽을 것이라 믿어왔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지 못한 유령 같았다. 2014년 4월, 나는 한창 연애 중이었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낮에는 스터디를 하거나 자습을 하고, 저녁에는 애인을 만나 데이트를 하곤 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며 시간을 낭비하던 시절이었다. 겉으로는 “이제 진짜 시작이야,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외쳤지만, 눈앞이 캄캄해서 한 발짝도 디딜 수 없다고 내심 곪아갔더랬다. 16일에 시작된 사건에 나는 무심했다.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
계속 맴돌 것이다 우리 집 셋째 고양이는 수다냥이다. 깨어있는 시간에도 쉼 없이 꽁알 꽁알 중얼거리고, 밥 달라, 놀아달라, 관심을 달라, 계속 소리 지른다. 처음에는 소리가 크진 않았다. 길 생활 때 앓은 폐렴 탓일까, 목소리가 마치 작은 까마귀 같다. 쥐어 짜내는 것처럼 나던 까아아, 하던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어느 순간, 득음을 하시고선 이젠 까아아, 어찌나 크게 소릴 지르는지, 귀에 쨍쨍 울린다. 이명이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웃간 소음 문제도 신경 쓰이지만 사실 이웃집들에도 문제는 많다. 밤낮없이 같은 곡만 바이올린을 켜대는 옆집이나 골프라도 치는지 밤중에도 무겁고 작고 딱딱한 공이 떨어지고 굴러다니는 윗집이나 어디선가 흘러드는 담배냄새 집이나 우리 집이나 그렇게 불편하게 서로를 참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
저 지금 진지하게 낯가리는 중입니다 "나 정말 낯가려서 큰일이야."라고 말하면 모든 친구들이 손담비가 업신여기는 표정을 지으며 "니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배우자까지도 장난으로 거기에 동조한다. 그 정도로, 겉보기엔 너무나 "외향인 이미지(?)"인 나는 사실 낯을 너무 가려서, 첫 만남에서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입을 계속 나불(!)거리는 스타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알고,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주고 싶거나 최소한 유해한 사람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 아무 말이나 계속 따발 따발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스타일이다. 결과는? 참혹(?)하다. 심지어 나를 "사이비 종교인"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가끔 생긴다. 그건 그나마 낫다. 가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나에 대..
New Me 오늘은 개나리꽃 봉오리들이 속닥속닥 노란빛을 살그머니 내보이는 걸 보았다. 햇볕 잘 드는 곳에서 노란 산수유 꽃과 백매화들이 이미 노래를 시작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 식물을 잘 찍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아마 애정이 담기기 때문일 거라고들 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만큼 충분히 잘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관목과 풀, 꽃과 이파리, 여러 가지 껍질을 가진 나무들, 그런 나무 북편에 낀 이끼, 크고 작은 버섯들. 그 모든 이름을 알지 못해서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농사일이나 화훼 일이나 목공예를 하는 것을 오래도록 꿈꿨다. 식물과 가까운 삶을 살고 싶었다. 최소한 화분이 가득한 집에서 살고 싶었다. 물론 고양이들과의 동거로 나는 캣그라스나 기르곤 하지만 말이다. 내가 장미를 좋아해서..
전업 시인은 없다 "전업 시인은 없다." 시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선 '웃픈' 문장이다. 시를 읽고 쓰기 시작한 지 3년 차가 되니 이제 그 문장이 더 이상 웃기지도 슬프지도 않지만. 내가 자기 소개를 할 때 "시를 쓰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적확하지 않다. 그렇게까지 시를 사랑하며 쓰고 읽는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내 생을 일구는 수단들 중에 시가 그렇게 부피가 큰 가, 아니다. 나는 집안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여러 가지 물건들의 상황과 가정 재정을 살피는 일에 제일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쓰고 있다. 시로 돈을 벌어본 일은 한 번도 없거니와, 시 쓰는 일과 관련된 일로 돈을 벌어본 것은 '습작생'으로서 임했던 인터뷰에서 받은 몇만 원의 사례뿐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를 소개하며 "전업 주부예요."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