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개나리꽃 봉오리들이 속닥속닥 노란빛을 살그머니 내보이는 걸 보았다. 햇볕 잘 드는 곳에서 노란 산수유 꽃과 백매화들이 이미 노래를 시작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 식물을 잘 찍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아마 애정이 담기기 때문일 거라고들 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만큼 충분히 잘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관목과 풀, 꽃과 이파리, 여러 가지 껍질을 가진 나무들, 그런 나무 북편에 낀 이끼, 크고 작은 버섯들. 그 모든 이름을 알지 못해서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농사일이나 화훼 일이나 목공예를 하는 것을 오래도록 꿈꿨다. 식물과 가까운 삶을 살고 싶었다.
최소한 화분이 가득한 집에서 살고 싶었다. 물론 고양이들과의 동거로 나는 캣그라스나 기르곤 하지만 말이다. 내가 장미를 좋아해서 다행이다. 장미는 다행히도 고양이에게 해롭지 않다. 가끔 기념일에 장미로 집을 장식하고서 몹시 감격하곤 한다.
하지만 사주팔자를 보면 나는 '다이아몬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금이라고 한다. 원석이지만 이미 압력과 열을 모두 견디고 태어난 완성 직전의 다이아몬드. 그래서 내가 가진 날카로운 모서리에 사람들은 긁힐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단련과 가공이 필요하다고 했다. 금속이나 보석을 다루는 일을 하면 좋을 것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나는 이 모든 말이 싫었다. 바다와 같은 큰 물이고 싶었고, 모든 것을 품는 큰 땅이고 싶었다. 이혼 하면 팔려나갈 반지에나 올라가는 희고 작은 돌, 가장 단단한 칼날이 되어 다 잘라버릴 뿐인 돌이고 싶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냐면, 재취업을 해볼까 하고 취업앱을 뒤지다가 정체모를 회사에서 연락을 받고 면접을 보러 가서 시작된 일이었다. (전업 시인은 없다 참고)
"실장님"으로 불리기 전에 그 회사에서 황급히 나온 후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신과 치료가 잘 되어가고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예전의 나는 폭식하고 폭면하고 게임이나 술 같은 것에 중독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헬스PT와 주얼리 공예 수업을 등록했다. 둘 다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카드빚을 내서 한 것들이다. 갚아야 할 돈이 쌓였다. 하지만 조금도 후회되지 않는다. 집에서 울며 자며 시켜먹을 배달음식 값도 그만큼 이었을 테니까. 인터넷 충동구매로 입지도 못할 옷과 쓰지도 못할 물건이 집에 쌓이기만 할 것이니까.
금속을 만나는 일은 내가 기대했던 것을 충분히 충족시켜줄 뿐더러, 그 이상으로 나를 기쁘게 한다. 주얼리 공예에서는 은과 금을 주로 다루고 황동과 적동도 다룬다. (은을 주로 만지고 있으므로, 은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그들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고, 또한 약간 힘을 더 주거나 불을 조금만 더 오래 쐬어도 완전히 다른 것이 되곤 한다. 망치질 몇 번에 반지는 호수가 달라진다. 내가 알고 지내던 반들반들한 주얼리들의 표면은 거칠고 날카로운 상태에서 조금씩 한 겹씩 매끄러워지며 완성된 것들이었다. 줄에 갈려나가는 물질의 크기는 먼지와 같고, 광을 내는 과정에서 벗겨져나가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서 연기가 나는 것만 같다. 금속을 자를 땐 힘만으로는 줄톱만 부러뜨려먹을 뿐이다. '은, 내가 여기 이렇게 지나갈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속삭이면서 살살 그저 '톱이 지나가야' 한다.
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은은 잘리거나 갈려나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느낌이다. '주얼리로서 새롭게 태어난다.'같은 식상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은이 하는 말을 잘 듣지 못하면 은은 그저 망가질 뿐이지만, 내가 톱이나 줄, 사포, 같은 것으로 은와 잘 대화하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된다. 어딘가 보이지 않던 곳에 있었던 것을 나와 은이 함께 만드는 느낌이다. 잘려나가거나 가루가 된 은도 결국 다시 녹여 쓴다. 그러고 보면 은은 여럿이 아닌 단일한 존재 같기도 하다.
관심은 있었지만 잘 알지는 못했던 원석, 보석의 세계에도 조금씩 발을 들여놓고 있다. 어찌나 하나도 같은 것 없이 아름답지 않은 것 없는지!
즐거운 것 또 하나는, 연습하며 만드는 것들을 주변에 선물로 나눠줄 수 있다는 점이다. 배우는 중이니 솜씨가 서툴기도 하고, 재료값과 시간을 들이는 것에 한계가 있으니 차근차근 하나씩 만들고 나눠주는 중인데, 며칠 전엔 처제가 자기도 예쁜 것을 만들어달라며 배우자에게 넌지시 말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헬스PT도 잘해나가고 있다. 금속을 다루는 일이나 몸을 다루는 일은 의외로 꽤 비슷한 일이구나, 생각하며 그에 관해서도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다. 몸이 개별적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몸이 개별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이 개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1번 은반지와 2번 은팔찌는 다르다. 이 생각들을 과연 정리할 수 있을까?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연도가 삼재 중 가운데인 '앉은 삼재'라는데, 삼 년 동안 계속되는 삼재를 지나면 10년 전후의 대운이 들어온다고 한다. 삼재에는 경거망동을 삼가고 조용히 내실을 다져야 그다음 들어오는 대운을 잘 살릴 수 있단다. 그러고 보면 작년에 꽤 경거망동했던 것도 있지만 나름대로 내실을 다진 결과로 인생을 두고 사귈 친구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올 앉은 삼재도 잘 보내고 있다.
잘 살고 있다. 매일 새로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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