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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남의 시"는 쓰지 말라

Agnieszka Osiecka

좋은 글이란 뭘까? 시 선생님께서 적어주신 "좋은 시 쓰세요."라는 문장은 어떤 의미일까? 적어도 "남의 글", "남의 시"는 쓰지 말라는 뜻으로 여기고 있다.

이 년 정도의 고민 끝에, 나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을 쓰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내가 쓴 문장이 대체 불가하다면 그것이 모여 좋은 글이 되리란 믿음을 세워보았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은 또 어떤 문장일까, 고민에 빠지고 만다.

생각을 할 때 골몰하는 편은 아니다. 나는 풍선을 여러 개 정수리에 붙이고 다닌다. 그들은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를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터지기는커녕 일그러져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진다. 그러므로 풍선들이 이어진 가느다란 실이 하늘하늘 움직일 때, 정수리를 통해 가만히 그것을 느끼곤 한다. 고양이들과 놀아주다가, 길을 걷다가, 게임을 하다가, 배우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어,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글감을 감지할 때, 그것을 구성할 때, 그리고 그것을 문장으로 내려놓을 때 최선을 다해 나로 하여금 하게 할 것"이 내 잠정적 목표다.

내 안에는 20세기 남자가 살고 있다. 시 선생님께서 "백인 남자가 쓴 책을 많이 읽어, 가끔 내 안에 백인 남자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라고 하셨던 말씀을 듣고 내 안엔 어떤 것이 들어 있나 생각해본 결과이다. 원인은 역시 학창 시절 권장되던 독서 범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게다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그곳에서도 20세기 남자들이 정리한 철학사부터 배우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산문을 쓰기 시작하면 내가 마치 짜라투스트라라도 되는 것처럼 굴게 된다. 오- 위버멘시-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이 될 것이다- 오오- 내 말은 그들의 귀에 합당치 않는구나-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외치는 슈퍼-맨.

글감을 더듬거리다, 화들짝 놀라고 만다. 맙소사, 누가 누굴 가르치려고 하고 있었지? 이토록 타자를 업신여기는 삶의 태도라니, 끔찍해. 나는 나를 미워하고 만다.

그래서 다시 더듬거리면 이번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동정받고 사랑받아 마땅한, 그렇지 않으면 사그라져버릴 것만 같은 각설이 하나가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니체의 책에서도 광대가 등장한다. 아, 줄 타는 사람이었던가?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읽은 지 오래되어놔서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내 글을 읽어줘요, 내 글을 읽고 나를 내 글을 사랑해주세요. 작년에도 왔던 재주를 부려본다. 또 나는 내가 밉다.

밉고 미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약을 먹고 잠을 청한다. 고양이가 와서 붙어 눕는다.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잠에 빠져든다. 고양이에게선 우리가 알 수 없는 파장 같은 것이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 왔던 손님들 대부분은 낮이든 밤이든 한 잠 푹 자고 가곤 하니까. 한 잠 푹 자고 일어나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게임을 하고 고양이와 놀아주고 밥을 차려 먹고 책을 조금 읽는다. 조금은 내가 덜 미워진다.

눈을 감고 내 풍선들을 가만가만 느껴본다. 그들이 그곳에 여전히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다.

 


 

Agnieszka Osiecka는 폴란드의 시인이자 극본가, 작사가이다. 이 글에 쓸 이미지를 검색하다 알게 되었다. 곡을 검색하자 처음부터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폴란드어는 들어볼 기회도 없었던 언어라, 뜻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구글링 끝에 한국어 번역을 찾았다. 곡의 가사는 이미 멋진 시였다.

"아, 이런 시 쓰고 싶다."

-또, 또. 너는 너만의 시를 쓰라니까?

 

 

Filiżanka kawy (커피 한 잔)

Agnieszka Osiecka

이 불쌍한 사랑은 
커피 한 잔에 모두 들어맞을 것입니다. 
이 사랑 
 슬프게 하고, 마시고, 호기심 많은 사람을 보자. 

작은 검은-갈망, 
큰 검은-희망.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때 약간 깨지기 쉬운 행복을 가진 

블랙커피 한 잔 
. 
조바심, 지루함, 부러움, 
매일 컵 그리고 더 자주. 슬픔의 바스라기를 가진 

블랙커피 한 잔 
, 
쓴맛에 대한 향기로운 두려움. 
예쁘지 않습니까? 

작은 검은-갈망, 
큰 검은-희망.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때 

블랙커피 한 잔
바닥에 숨겨진 가시, 
재미를 위해 게으름, 
매일 컵을 더 자주. 

블랙커피의 바다가 
우리 사이에서 얼어붙었습니다. 블랙 벨벳처럼 Miętutka 
커피 한 잔에 
난파. 

작은 검은-갈망, 
큰 검은-희망.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때 

이 불쌍한 사랑은 
커피 한 잔에 모두 들어맞을
이 사랑 
 슬프게 하고, 마시고, 호기심 많은 사람을 보자.

 


 

-Miętutka는 무슨 뜻일까? 내가 아는 언어들로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고유명사일까? "미에퉅카"라고 읽는 모양이다.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를 여러 번 발음해보면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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