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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저 지금 진지하게 낯가리는 중입니다

"나 정말 낯가려서 큰일이야."라고 말하면 모든 친구들이 손담비가 업신여기는 표정을 지으며 "니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배우자까지도 장난으로 거기에 동조한다.

이미지 출처 : http://www.newsjeju.net/news/articleView.html?idxno=43468

그 정도로, 겉보기엔 너무나 "외향인 이미지(?)"인 나는 사실 낯을 너무 가려서, 첫 만남에서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입을 계속 나불(!)거리는 스타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알고,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주고 싶거나 최소한 유해한 사람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 아무 말이나 계속 따발 따발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스타일이다. 

결과는? 참혹(?)하다. 심지어 나를 "사이비 종교인"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가끔 생긴다. 그건 그나마 낫다. 가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나에 대한 정보를 노출해서 상대가 첫 만남에서 원하는 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후에야 혼자 벽에 머리를 찧으며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입 다물고 있는 게 그렇게 어렵니, 하고 마음을 다 잡아도, 또 낯선 사람을 만나면 반복되는 일이다.

오죽하면 2020년 최대 목표 리스트에 "입을 다물자."가 있겠는가.

물론 순기능도 있다. 그러다보면 웬만한 활동에서 사람을 한 사람 이상 꼭 얻게 된다. 아이 참, 좋은 사람들이 많다!

나는 2년 전까지만 해도 대인기피증이 심해서 거의 모든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병은 5년 이상을 나를 집 밖으로 나가기 힘들게 만들었고 누군가와 관계 맺는 것을 고통스럽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시를 배우는 무지개 책갈피 수업에 나갔던 것이 병 이후의 첫 활동이었고, 그 후로 어딜 가든 꼭 한 명 이상과 "친구"라는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은 특성이 바로 그 "나불거림"이었다. (이런 나라도 친구로 여겨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러니까 나도 잘해야지.)

그래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수를 하는 경우도 생기고, 어떻게 생각하면 폭력적인 특성일 수도 있기 때문에 고쳐야 하는 버릇(?)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살펴보고 이것저것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다 며칠 전 배꽃 인공수분 알바를 하러 갔던 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분께서 굳이 나를 겨냥하여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큰 느낌표를 찍은 것만 같았다.

"재밌는 사람은 굳이 재밌는 말이나 재밌는 행동을 해서 재밌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사람 자체가 재밌는 거야."

나는 누군가를 웃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즐겁게 해주고 싶고 재밌게 해주고 싶다. 아마 첫 만남의 어색함을 어찌하지 못해 입을 나불거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내가 굳이 "재밌는 사람"이어야 할까? 재미있음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를 재미있어하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나라는 사람이 재밌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내가 억지로 웃어달라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있을까? 그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 아닐까.

나는 되도록 좋은 사람이고 싶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는 가능성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그건 상황과 상대와 타이밍이 모두 충족되어야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내 배우자에게 이런 내가 좋은 사람일 수 있듯. 인연이란 게 이런 거구나, 괜히 이선희 씨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그리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에 오히려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게 좋은 사람 찾기"엔 좀 소홀하지는 않았던가도 생각해보았다. 

역시 고양이들에게 한 수 배우는 것이 좋겠다. 고양이는 고양이라서 귀여운 것이지 굳이 어떤 행동을 해서 귀여운 것이 아니니까.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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