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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2013년 말부터 나는 대인기피증을 겪기 시작했다. 한동안 삶이 고여 있었다. 13년 가을에 만난 애인 외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나는 28세에 죽을 것이라 믿어왔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지 못한 유령 같았다.

 

 

 

2014년 4월, 나는 한창 연애 중이었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낮에는 스터디를 하거나 자습을 하고, 저녁에는 애인을 만나 데이트를 하곤 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며 시간을 낭비하던 시절이었다. 겉으로는 “이제 진짜 시작이야,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외쳤지만, 눈앞이 캄캄해서 한 발짝도 디딜 수 없다고 내심 곪아갔더랬다.

16일에 시작된 사건에 나는 무심했다.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배에 내가, 내 주변 사람이 타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언제 어디서나 사고는 일어나고 사람은 죽는다.’며.

함께 스터디를 하던 친구가 세월호의 일에 며칠 동안 고통스러워했다. 몇 주 동안 그랬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친구에게 ‘진실한 조언’이랍시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했다. 눈앞에 있는 영어 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때 화를 냈다. “그 배 이야기 그만 좀 해라!”

그 친구와는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크게 싸우고 절교했다.

나는, 다 알면서 그랬다. 변명의 여지없다.

 

 

2016년 5월, 나는 검찰직 7급으로 방향을 정하고, 높은 합격률을 자랑하는 노량진 학원도 다녀가며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하며 살고 있었다. 시험을 한 달 안팎 앞둔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남역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학원을 가지 못했다. 3일을 연달아 10번 출구 앞에서 서성였다. 두 손바닥을 문대며 강남역 근처를 걸어 다녔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빌고 또 빌었다. 영어 단어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흩어진 넋들을 따라 손바닥을 문대며 길바닥을 헤맸다.

그대로 나는 그 해 여름을 맞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그만뒀다. 애인의 자취방에 들어가 살게 되었고, 몇 달 동안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프러포즈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고, 우리는 슬그머니 서로를 배우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2014년도에 있었던 일을 위키 백과에서 검색해봤더니, 커다란 하얀 개 ‘상근이’가 그 해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와 배우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갈 계획이다. 언제 어떻게 가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내 삶을 살아도 괜찮은 걸까, 여전히 문득문득 의문이 든다. 내가 행복해도 되는 걸까?

14년에 싸우고 헤어졌던 그 친구에게는 재작년에 내가 조심스레 연락을 해서 사과하고 다시 연을 이었다. 고마운 일이다. 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퀴어 친구와 연이 닿아 지금까지도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삶은 흐르고 슬픔이 쌓여간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14년도에 있었던 일들을 서술한 문장들의 꼬리가 질질 끌렸다.

사망하였다. 대피하였다. 결정되었다. 선포하였다. 숨졌다. 부상을 입혔다. 발령되었다. 인명피해는 없었다. 당선되었다. 사망하였다. 퇴위하였다. 실시되었다. 사형이 선고되었다. 발사하였다. 수용하였다. 훔쳐 달아났다. 피격 당했다. 밝혀졌다. 매몰되었다. 집전하였다. 합의하였다. 다시 돌아갔다. 실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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