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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찐으로 여자를 좋아하기

며칠 전 친구 커플과 함께 더블 바캉스를 다녀왔다. 코로나 시대라 망설여졌지만, 우리들에겐 휴식이 절실했다. 궁리 끝에 완전 독채인 펜션에서 타인과의 접촉을 금하고 우리끼리의 위생조치도 철저히 하며 짧게나마 일박이일을 놀고 쉬었다. 

2인 가족 둘을 이루는 4인이 모두 여성애자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우리들의 관심이 쏠려 있던 것은 레드벨벳 아이린&슬기 듀엣의 유닛 활동이었다. 우리 중 한 사람이 오랫동안 ‘걸그룹 행복 추진 위원회 회장님’이었고, 나도 최근 그 위원회에 전무이사쯤으로 진입하였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배부르게 먹고 쉬어가는 타이밍에 잠시 유튜브로 그 듀엣을 같이 보자며 다들 늘어졌다. 그리고 2시간은 순삭 되었다. “몬스터” 뮤비는 종류별로 5번씩은 돌려본 것 같다. 거기에 링크로 붙는 걸그룹 영상의 바다에서 우리는 감탄하고 웃고 떠들고 심각해지기도 했다. 펜션을 독채로 빌렸으니, 누가 듣거나 불편할 일도 없었다. 큰소리로 아이린과 슬기의 잘났음을 맘껏 떠들 수 있다니, 해방된 기분이었다.

 

 

지방의 도시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따돌림’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따돌림’이라거나 ‘이지메’라고 불리는 것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놀림거리가 되고, ‘재수 없는 애, 인기 없는 애’라는 별칭으로 불린 시절의 하루하루는 놀랍도록 모두 기억이 난다. 나를 유난히 매몰차게 대했던 애의 하얗고 통통했던 뺨 위 주근깨 모양까지 다 기억난다.

장기자랑을 해야 했는데, 선생은 그 현상을 막아보겠다며 ‘모두가 빠짐없이’ 무대를 꾸밀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그래서 ‘제일 인기 많은 애들’ 그룹만 ‘H.O.T’의 ‘캔디’ 무대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애들은 각자의 암묵적 등급에 따라 무대를 골라가졌다. 나는 당시에 춤추는 걸 좋아해서 ‘1그룹’ 애들의 춤 선생 노릇을 했고, 그 기간 동안만 특별히 ‘2그룹’에 속할 수 있었다. 1그룹과 2그룹의 연습시간은 당연히 겹치지 않게 조정되어야 했고, 나는 두 그룹 모두의 연습시간에 참여해야 했다. 엄마는 ‘딸년이 상경하더니 춤바람이 났다’고 노발대발했지만, 나는 엄마를 설득할 수 없었다. 무단으로 귀가시간을 어기거나 학원을 빠졌다. 설득이 필요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사실대로 말했는데, 엄마가 계속하는 말이라곤 “친구들에게 왜 ‘안 된다’고 말을 못 해?”였다. 걔들이 내 ‘친구들’이 아니라는 걸 엄마는 여전히 모를 것이다.

그리고 3그룹이 있었다. 3그룹의 무대는 ‘S.E.S’의 ‘I’m your girl’이었다. 3그룹의 리더는 어리숙했던 내 눈에도 번쩍 띄는 애였다. 키도 컸고, 날씬했다. 청량한 소리라도 날 것 같을 정도로 결 좋은 생머리를 멋들어지게 관리하고, 하얀 얼굴 양쪽을 머리카락으로 가려서 정말 S.E.S나 핑클의 멤버 같이 하고 다녔다. 검거나 흰 옷을 입곤 했고, 여름날엔 가끔 하늘하늘하고 반들반들한 재질로 된 검은 나시 ‘배꼽티’를 입기까지 했다. 언제나 말을 아끼는 애였고, 움직임도 고요했다. 여자애들은 그 애를 두고 ‘미친년’이라고 수군댔다. 그 애가 리더가 되어 꾸민 무대는 너무나 멋있었는데, 다들 미리 짠 ‘무반응’으로 박수조차 없이 마무리되었더랬다.

나는 그때 말 못 할 고민이 또 하나 있었는데, 2차 성징과 함께 코에 생기기 시작한 ‘블랙헤드’였다. 고민을 나눌만한 친구가 없기도 했지만, 뭣보다 그 ‘블랙헤드’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의논할 수 있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외모에 대해 드러내 놓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1그룹’ 애들뿐이었다. 외모에 관심을 가지면 ‘공주병’이거나 ‘미친년’이었다. 심지어 ‘창년’이라는 단어를 알아온 애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다른 애들의 눈을 피해서 ‘3그룹의 리더’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코에 이거, 어떻게 하면 없어지는지 너는 알아?” 

그 애는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걔는 언제나 그랬다. 애들이 모지게 괴롭히고 욕해도,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무표정하게 평소의 속도대로 그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그런 속도대로 그 애는 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폼 클렌저로 세수하는 거 맞지?”

“응? 응…….”

마치 ‘오이비누’로 세수하고 난 후처럼 얼굴이 당기는 기분이었다. 그 애는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말을 이었다.

“너무 세게 말고, 천천히 눌러가면서 폼 클렌저로 잘 문질러서 여러 번 씻으면 좀 없어져. 근데 또 생기니까 잘 씻는 수밖에 없더라. 씻은 다음에 꼭 스킨이랑 로션 잘 발라줘야 해. 안 그러면 껍질 일어나.”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애와 나 사이의 대화는 그게 다였다. 살다가 가끔 그 애가 생각나면, 그 애도 나를 기억하는지, 또 그 애가 그때의 나에 대해 묘사하면 어떨지 궁금하다.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위와 같은 일은 내가 자랐던 환경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3그룹’에게나 ‘허락’될 수 있는 무대는 ‘여자 아이돌’의 무대였고, S.E.S나 핑클을 좋아한다고 모두 앞에서 드러내 놓고 말했던 친구는 어릴 땐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소녀시대’를 비롯해서 여돌들에게만 유난히 따라다니는 ‘그룹 내 불화설’역시 여전하다. 그래도 요즘은 여성인 학생이 여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흠결이 되는 분위기는 아니라고 한다. 

 

 

나도 이제는 연예인 누구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오마이걸’이라고 말한다. 왜 ‘방탄소년단’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꽤 있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에게 “제 관상을 보세요. 방탄소년단을 좋아하게 생겼나요? 아무리 봐도 아니죠?”라고 우스갯소릴 당당하게 하고 싶지만, 아직도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기 일쑤다. “지난번에 ‘퀸덤’에서 처음 제대로 보게 되었는데, 그동안 여돌들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다가 그때 보니까 너무 잘하고 실력도 있고 열심히 하는 것도 보기 좋고, 계속 응원해주고 싶고 본받고 싶더라고요!” 어쩌고 저쩌고 말이다.

 

출처: 오마이걸 공홈 메인

 

글을 마무리하면서 홍보를 하나 띄워본다. 내일 월요일 6시에 ‘여자친구’의 컴백이 있다고 한다. ‘걸그룹 행복 추진 위원회 회장님’의 공지를 받았다. 그동안 ‘여자친구’의 활동을 3부작으로 꾸미는 프로젝트의 2회 차라고 한다. 지난 1회 차였던 “교차로” 뮤비에서는 여자친구의 전 활동 오브제들이 다양하게 나온다. 감상 포인트이니, 한 번씩 봐주세요.

 

 

‘나는 찐으로 여자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말에 합당할 정도로, 찐으로 여자를 좋아하고 싶다.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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