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은 ‘에이즈를 고치는 과학자’였다. ‘의사’가 아니었던 것은 순전히 무지와 반항심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법관이나 의사가 되길 간절히 바라셨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지만 글쎄, 법관이나 의사가 되어야만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나?’하는. 그중에서도 왜 하필 ‘에이즈를 고치는’이라는 목적의식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 어린 시절 읽었던 책 속에서 에이즈는 ‘불온한 질병’이자 ‘불치의 질병’으로 묘사되었고, 어린 나는 불온함의 대가가 불치의 질병이라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어떤 불온함이든 말이다. 결국 그 아이가 커서 사회의 ‘불온 분자’가 되었으니 참 선견지명이 있었다.
대학을 다니던 20대엔 가족 사업에 노동력을 동원당했고, 20대 후반 박차고 나와 겨우 얻은 직장은 유통, 물류 현장 사무실 일이었다. 슬프고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버티기 위해 알코올 중독 증세뿐만 아니라 담배는 하루에 두 갑씩 피워댔다.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시절을 덜 곱씹게 된 것 같다.
그 후로 이것저것 되는대로 일하며 작고 귀여운 돈을 벌어가며 살고 있다가 위독하거나 너무 어린 고양이 세 마리를 순차적으로 어쩔 수 없이 구조/입양하게 되면서 2년 넘게 일을 쉬었다. 집안일을 전담하고, 벌이는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위임했었다. 고양이들도 이제 막내가 첫 돌을 맞았으니 다시 나도 일을 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작은 가게 하나를 냈다. 여기저기 돈을 끌어왔더니 허리가 휜다. 그래도 잘해보려 한다. 사업 초반이라 당연히 벌이가 없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여기저기 다니고 있다. 이번엔 마트에서 비타민을 파는 판촉 행사에 다녀왔다.
“대한민국 1등 비타민~ 원료부터 생각한다면 **** 비타민C~ 카드 할인 많이 해드릴게요~!”
9시간 동안 서서 소리를 지르고 호객을 하고 있다 보니 요즘 마스크 쓰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상대의 귀찮아하는 표정을 덜 봐도 되고 나도 입꼬리까지 올려 웃지 않아도 된다. 눈꼬리만 샐샐 당겨 웃으면 그만이다.
유통/물류 일이라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끊었던 담배를 하루에 한 대 정도 피우고 있다. 퇴근하고 들어가는 길에 한 대 하고, 들어가서 바로 씻고 나서야 고양이들을 만난다. 생전 안 그러던 애가 왜 자꾸 밖엘 나돌아 다니냐며 고양이들이 야옹야옹 얼마나 혼내는지. 걔들은 평생 내가 집에만 있는 것만 봐서 낯선가 보다.
마트 직원 언니들, 다른 상품 판촉 행사 언니들은 대부분 서로의 사정이 비슷하므로 상부상조하는 분위기다. 곰살맞게 굴었더니 여러 가지 많이 도와주시고 예뻐해 주셨다. 심지어 매출까지 올려주시고, 세상 좀 따뜻하다 싶었다.
(근데 나도 그 언니들 상품을 샀어야 했을까? 흠.)
세상에 비타민 같은 사람은 못 되었지만 세상에 비타민 샘플 많이 나눠주는 사람은 되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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