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거나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화창하게 맑은 날씨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일관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의 마음은 간사해서 오래도록 비가 오면 맑은 날이 그립고, 땡볕 아래를 걷는 중에는 ‘비나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이왕이면 눈이 펑펑 내려버렸으면!’ 생각하곤 한다. 그래도 이번 여름에 길게 이어진 빗속에서는 많은 이들이 밝은 해를 어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올해 40일을 넘겨 계속 비가 왔던 것은 환경 파괴로 인해 기후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절실히 느껴지는 위기감에 나 역시도 일회용품과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낯 모를 생명들이 함부로 희생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원래 나는 여름의 장마를 좋아했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마음 말고, 내 안의 아주 깊은 곳에 단단한 쇠구슬 같이 가라앉아 있는 마음들 중의 하나가 그것을 사랑한다.
나는 비 오는 경복궁을 사랑한다. 나와 가까이 지내며 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을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주 적다.
경복궁 위에 내리는 비는 봄이나 가을에 보슬보슬 내리는 고요한 비여도 좋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는 장대비, 그것도 장마철 며칠 간 내리고 또 내려서 이제는 젖지 않은 것이 없을 것만 같을 때 남은 것마저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이 내리는 세찬 비다.
그럴 때 경복궁에 가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입장권을 받아주는 분들도 ‘이런 뒤숭숭한 날씨에 웬 처자가 혼자 여길?’이라는 표정으로 경비실(?) 안에서 나와서 표를 받고 들어가시곤 했다. 들어가서 구석구석을 거닐다 보면 아주 가끔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는데, 백이면 백 그들은 나를 보고 흠칫 놀라며 빠르게 사라진다. 내가 구석에서 조용히 지나가니, 어떤 사람은 비명까지 지르고 도망쳤었다. 아마도 이승의 것이 아닌 것으로 오인받았으리라. 죽은 사람도 언젠간 산 사람이었을 텐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장마 중이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비가 그렇게 오는 경복궁을 거닐다보면 반드시 발과 다리, 옷까지 모두 젖게 되는데 갓 내리는 장대비가 아니라 며칠 동안 씻겨나간 후의 장맛비엔 그 일이 그렇게 찝찝하지 않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깨끗한 기왓장과 물이 찰랑찰랑 차 있는 박석 마당과 구름과 안개 사이 포슬포슬한 수증기가 근정전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를 빼먹고 경험한 그 공간에 홀딱 반해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여름 장마철엔 연례행사처럼 혼자 비 오는 경복궁을 찾곤 했다.
매번 달라지는 내 옷과 신발에도 그곳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의 행동에 대단히 시적이거나 철학적인 의미 같은 건 차마 부여하지 못하겠다. 무거웠던 20대의 여름들을 경복궁 구석구석에 내려놓고 왔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서울시민이 아니고, 여름 장맛비 속의 경복궁이 여전히 그러한지 모른다. 뜨겁게 달구어진 돌덩이 하나를 겨우 내려놓고 올 수 있는 그런 곳이 하나쯤은 있으면 사람은 숨을 쉴 수 있다. 그래도 여태 숨을 쉬어 왔으니 나만의 여름 전통을 잃은 후에도 여기저기 끓어 넘쳐 굳어버린 현무암을 던지며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 그 돌을 놓고 있었을까 되짚어봐야겠다. 아무래도 항상 잘 놓지만은 않았겠지? 부디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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