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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시 좀 써라~

김행숙 시인의 새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를 훑어봤다. 책을 정독하기 전에 미리 훑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드라마나 만화책이나 영화도 미리 시놉시스와 엔딩까지 모두 찾아보고, 감상 포인트를 알고 나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스포일러 완전 환영!”이다.

시를 읽기 시작한 2016년부터 김행숙 시인은 언제나 좋아했다. (나는 2016년 전에는 시집을 굳이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새 시집이 나오다니! 신난다! 시는 한 편씩 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역시 시집으로 나온 것을 읽는 것이 백만 배 좋다. 시집을 기획하고 시를 시집 안에 배치하고 구성하고 ... 표지까지 고르는 그 과정을 열심히 따라가며 시인을 열렬히 찬양(!)할 수 있으니까!

특히 시인의 역대 시집을 차례로 살펴보는 일은 더욱 즐거운 일이다. 시집이 보여주는 시인의 변화는 함부로 ‘성장’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발전’이라는 단어도 적합하지 않다. 대체 어디로 가야 성장이고 발전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단순히 ‘변화’라는 말은 그 변화를 다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만사만물이 모두 변하는 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확장’이라는 단어도 생각해보았는데, 어떤 시인은 ‘수렴’하기도 하니 그 단어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오그라드나?’며, 시와 시인을 함부로 일치시키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사람으로서의 시인과 시인으로서의 시인은 분명 다르고, 시인은 시와 별개로 충분히 수렴할 수 있다. 뭔 말이냐 싶으면, 시를 꾸준히 읽어보면 된다. 한 3년 정도 한 달에 최소 한 권 이상. 그럼 알 수 있다. (모르면 말고)

김행숙 시인의 시는 일견 보드랍다. 잘 만들어진 마사지볼 같다. 맨들맨들하지만 미끄럽지 않고 차갑지는 않은데 따뜻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걸 몸에 대고 누르면 크, 으악, 캬, 으윽, 정확히 그곳이 마사지된다. 뾰족하지 않은데도 적확하다. 너무 좋다.

이번 새 시집도 훑어보니 그러했다. 이번엔 약간 효자손 같기도 할 것 같다. 두근두근하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부터 정독해야지. 앉은 자리에서 모두 읽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아까우니까.

그러고 보니 올해 들어 시를 거의 쓰지 못했다. 시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바쁘고 정신없는 2020년이다. 배우자에게 “으악, 벌써 디쎔벌이야!”하고 외쳤다. 한여름용 옷을 집어넣고 가을용 옷들을 꺼내야 한다며.

김행숙 시인의 시를 읽으니 시가 몹시 쓰고 싶어 졌다. 간절하게. 김행숙 시인을 좋아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시를 쓰는 일이 지난하다고 느껴졌던 시기에 김행숙 시인의 시를 읽고 단전에서 시심이 막 일어났던 것이 기억난다. 지칠 때 읽으면 더욱 좋았다. 물론 시가 마냥 밝고 명랑해서는 당연히 아니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시 좀 써라~”하고 시크하면서도 다정하게(둘은 공존할 수 있다) 말해준다.

김행숙 시인이 가르치고 있다는 학생들이 매우 부럽다. 물론 그 학생들은 과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겠지...?

“좋은 시 쓰세요.”라고 웃으시던 선생님이랑, “나한테 시 배운 학생.”이라고 부끄러워하시며 말씀하시던 선생님이랑... 내 맘 속 나의 시 선생님들이 너무 보고 싶은 밤이다. 그분들의 시집도 하나하나 다시 정독해야겠다.

시인에게 시를 배우는 것은 이래서 좋다. 그분들이 보고 싶으면 그분들의 시집을 읽으면 그 그리움이 조금 아주 조금은 달래 지니까.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