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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코로나 시대의 명절을 보내며

올 추석은 어떤 사람들에겐 일말의 자유를 주었을까? 굳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억지로 만나야 한다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음식을 잔뜩 해야 한다거나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거나, 명절이면 명절이라는 이유로 강요되었던 것에 실낱같은 선택권이 생겼을까? 코로나 시대이니 말이다.

 

나는 코로나를 핑계로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쩜 나는 이렇게나 하지 말라는 건 꼭 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를 가졌을까. 올 추석만큼 엄마가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집콕’을 했다. 너무 집 안에만 있으면 사람이 축축한 이끼 같아져서, 집 앞에 잠깐 산책 나갈 때도 마스크와 손소독제로 무장을 하고 다녔다.

 

반려인이 올해는 전을 부쳐줬다. 명절마다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느라 그럴 일이 없었는데. 기름 냄새가 진하게 도는 집 안에서 직접 부친 전을 먹고 있었더니 같이 처음 명절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기름 냄새에 흥분한 고양이들이 지르는 소리를 파티 BGM 삼아 ‘보건교사 안은영’을 넷플릭스로 보면서 뒹굴뒹굴하다니. 이만큼 퀴어한 명절이 따로 없겠네, 마주 보고 웃었다.

 

나는 꾸준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외부인(?)과 접촉할 일이 원체 잘 없는 삶을 살고 있어서 코로나 시대에 다른 사람들만큼 크게 영향 받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퀴어한 추석을 지내면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2020년의 많은 선택들이 코로나 시대에 기인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집에 차가 생겼다. 차와 함께 빚도 생겼지만 말이다. 어떻게든 갚아 가고 있는데, 한 달 한 달, 부품 하나씩 사고 있는 기분이다. 코로나 시대를 시작할 때쯤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금을 대폭 깎아준다고 해서 ‘질러버렸던’ 차다. 코로나 시대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기정사실이 되었을 때쯤이었는데, 세금 혜택뿐만 아니라, 당분간 어디든 이동해야 할 일이 생기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생각도 컸다.

 

차가 있다는 것은 정말 근사한 일이었다. 오늘도 밤 11시가 넘어서 오징어를 넣은 부추전을 먹고 싶은 반려인을 옆자리에 태우고 사람 없는 마트로 달려갔다 왔다.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도 몇 킬로미터 밖의 저수지를 구경하며 바람을 쐴 수 있다. 차를 산 것은 2020년의 수많은 선택들 중에 가장 잘한 일이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 선택 역시 코로나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작년의 계획에선 2020년에는 계약직이라도 일 년 이상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해서 돈을 벌 생각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일자리 구하기는 힘들어지고, 나로서도 굳이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어떤 글이든 평생을 써 온 것인데, 그것을 ‘취미’ 이상으로 제대로 도전해보지 않았다니,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나는 코로나 시대 속에서 처음으로 원고를 준비해서 출판사 문을 두드리고 있다. 대단한 돈이 벌리진 않겠지만 (물론, 대단한 돈이 벌리면 좋겠다! 대박을 쳐보자! 와와!) 그래도 한 번 해보는 거다.

 

코로나 시대로 힘든 사람들이 많다. 아마 안 힘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 즐겁다는 듯 적고 있지만, 사실 꾸준히 정신과를 다니며 약을 먹고 있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가 좋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다 보니 안 하던 것도 하게 되고, 못 보던 것도 보게 된다.

 

그냥 그런 말이 하고 싶었다. ‘코로나를 다 함께 이겨내자!’ ‘대한민국 파이팅’ 같은 구호는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지만, ‘우리 그래도 어떻게… 살아남아 봐요.’라는 말이 나누고 싶었다. 내게 인류애 같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없지만 말이다.

 

 

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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