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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전업 시인은 없다

 

"전업 시인은 없다."

시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선 '웃픈' 문장이다. 시를 읽고 쓰기 시작한 지 3년 차가 되니 이제 그 문장이 더 이상 웃기지도 슬프지도 않지만.

내가 자기 소개를 할 때 "시를 쓰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적확하지 않다. 그렇게까지 시를 사랑하며 쓰고 읽는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내 생을 일구는 수단들 중에 시가 그렇게 부피가 큰 가, 아니다. 나는 집안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여러 가지 물건들의 상황과 가정 재정을 살피는 일에 제일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쓰고 있다. 시로 돈을 벌어본 일은 한 번도 없거니와, 시 쓰는 일과 관련된 일로 돈을 벌어본 것은 '습작생'으로서 임했던 인터뷰에서 받은 몇만 원의 사례뿐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를 소개하며 "전업 주부예요."라고 말한다.

시로 돈을 번다는 것은 참 먼 일이다. 여기저기 들썩여보며 3년 가량을 보내고 나니, 시인이라는 직업이 정말 배고픈 직업임을 알았다. 제대로 된 시 한 편을 쓰는 일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약 1달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초보라 퇴고가 느린 나는 그나마 썩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 반년이 걸리기도 한다. 최저시급으로 하루 8시간 노동을 계산하면 8,590*8=68,720원. 1달 20일 근무를 한다고 하면 주휴수당을 빼고도 68,720*20=1,374,400원이다. 시 한 편을 쓰면 그런 돈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는 한 푼도 생기지 않는다. 

시를 쓰는 일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일이다. 남는 것은 '좋은 시' 뿐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를 쓰고 싶다.

"안 하면 안 돼?" 내 안의 누군가 속닥거린다. 그래서 잠이나 자버린다. 자고 일어나서, 주섬주섬 시집을 주워 읽는다. 또 쓰고 싶어진다. 한숨을 쉬고 나면 지저분한 싱크대가 눈에 밟힌다. 간밤에 미뤄두었던 설거지를 한다. 고양이가 밥을 달라고 다리에 감겨온다. 애오 애오 소리를 지른다. 세 마리의 고양이들은 밥을 먹고 나면 차례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화장실을 치워주며 환기를 한다. 가뜩이나 요 며칠 미세먼지가 많은데 어디선가 담배연기도 흘러들어와 화가 난다. 문을 연김에 조금이라도 청소를 한다. 

알바몬을 뒤적거리다 나쁘지 않아 보이는 사무직 계열에 '간편 지원서' 같은 걸 클릭해서 넣어본다. 연락이 오지 않는다. 삼십대 중반, 이렇다 할 경력 없이 이런저런 알바들만 전전해온 지정 성별 여성에게는 식당 주방 알바 자리에서만 러브콜이 들어온다. 식당 주방 알바 자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워낙 그런 일은 힘이 들기도 하니까, 아직은 그렇게까지 급한 상황은 아니다, 싶다. 배우자가 돈을 벌어오고 있으니까.  

그러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면서도 계속 내가 맡을 업무가 어떤 것인지 얼버무렸다. 일단 며칠 다녀보면서 파악해보기로 하고 다음날부터 나오기로 했다. 

첫째 날,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한 달 정도 되었다는 여자분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나를 넘겨다보며 말했다. "처음 왔어요? 이 일이 나쁘진 않아. 잘만 하면 돈 버는 일이에요." 나는 웃으며 "아, 네. 돈 좋죠." 대답했다.

이틀 째, 다른 자리에서 익숙한 멘트가 들려왔다. "네, 안녕하십니까? ㅇㅇㅇ투자설계를 맡고 있는 ㅇㅇㅇ실장입니다."  아, 큰일났다. 여기가 거기구나. 

교육시간, 아니나 다를까, "10억짜리 한 건을 하면 천만 원 리베이트가 들어와, 할 만하지 않아?" 란다. 맙소사.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천만원이라는 말에 얼마나 흔들리는지. 천만 원이면 월세가 얼마나 낮아지던가. 심지어 중고라도 나름 좋은 차를 하나 살 수 있다. 아냐, 잘 알아보면 월세가 아니라 전세를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흔들흔들.

혼자만 생각하다가 그날 저녁 회사에서 돌아온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배우자는 전에 없이 강하게 나를 뜯어말렸다. 당장 내일부터 나가지 말아 달라고. 그 말이 괜히 섭하게 느껴졌다. 나도 뭐라도 하고 싶은 건데, 한 달 정도 다니면 그나마 영업지원비라고 부르는 걸 몇 푼이라도 준다는데. 어렵게 구한 사무실 일인데. 그러나 그렇게 섭하게 느끼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니, 정말 이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딱 한 건만 걸려라. 그러면 그만둘 수 있지.' 카지노에 다니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다음날부터 그 일에는 나가지 않았다. 2박 3일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멍하니 얼이 빠져 있었다. 

어제 머리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주얼리 공방이 있었다. 한 번 배워봐도 되냐고 배우자에게 물었다. 그러고 나서 하루를 또 꼬박 잠을 잤다. 이제 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전에 시집을 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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