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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tra #005666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고요? -제인 오스틴, 《맨스필드 파크》

출처 픽사베이

제인 오스틴의 여성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것은 캐릭터를 묘사하고 다루는 제인 오스틴의 뛰어난 능력뿐만 아니라, 소설의 스토리와 주제에 맞는 성격의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선택하는 감각과 지성이 드러난 결과이다. 제인 오스틴이 페미니즘적인 면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면모다. 여성들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 온갖 모습으로 등장하며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간다. 외부인도 아니고, 욕망의 대상도 아니고, 남성 영웅에게 주어지는 트로피도 아닌 주체로서 자신의 욕망과 지성과 원칙을 가지고 살아 숨 쉰다.

제인 오스틴의 여성 주인공들 중에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를 꼽으라면 단연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이다. 200여 년간 이 작품과 이 작품의 주인공은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아왔다. 그 중 가장 동의할 수 없는 평가가 있다. “도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여성상.” 패니 프라이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래도 재치 있고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에 행동력까지 갖춘 여성들이 그러한 좋은 기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가부장제 속에서 억눌려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여성상을 상징하는 여성 주인공들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물론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동적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와 그녀가 등장하는 소설 《맨스필드 파크》가 가치가 떨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과연 이 소설이 진정 ‘여성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채 얌전히 자기 자리만 지키면 남성의 사랑과 부를 누리는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그렇다면 묻겠다. 패니 프라이스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패니 프라이스 같은 성격과 그러한 처지에 있는 모든 여성이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나?

운명이 패니 프라이스를 수시로 괴롭힌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렵고 신사숙녀적 교양은 없어도 깊이 사랑했던 원가족에게서 그녀는 강제로 떼어내져 맨스필드 파크에 오게 된다. 그 후로 “분별없는 사촌 언니들과 노리스 이모에게 부당하게 홀대받고, 부도덕한 연극 공연에 참가하도록 강요당하고, 음험한 남자의 거짓된 사랑에 시달리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라는 강압에 괴로워하고”, 일종의 징벌로서 이십년 가량을 지냈던 저택에서의 생활을 갑자기 접고 “고향 집으로 추방까지 당한다.”(류경희, 시공사, 제인 오스틴 전집 《맨스필드 파크》 해설 중 인용. 아래의 모든 인용 ‘같은 글’)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 길이 당연히 그녀에게 주어진 길이며, 심지어 그 길이 그녀에게 이득이 되는 길이라고 온 세상이 믿고 있다.

색안경을 벗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사실 아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선한 기질과 겸손한 태도와 예민한 감수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을 지켜낸 일이었다. 그게 ‘현실적으로’ 무슨 가치가 있냐고 되묻는다면 그런 되물음 자체가 패니 프라이스의 진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부당한 현실에 무릎 꿇는 것이 ‘현실적인 행동’이고, 부당한 현실에 맞서서 그 현실을 끝내 변화시키는 행동이 ‘영웅적인 행동’이라면, 패니 프라이스는 부당한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끝까지 지켜낸 영웅이 아닌가?

그것은 아마도 매순간 세상 전체와 결투를 벌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패니 프라이스는 한순간도 사색과 반성과 회복을 멈추지 않는다. 읽는 내내 패니 프라이스의 입장에 이입해서 자살사고에 시달릴 정도였다. 죽어버리지 않고 견디어 살아내고, 자신을 지켜내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이 조용하고 고독한 투쟁을 두고 누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 없이 함부로 말들 하지. 에이, 못된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백년 전 제인은 알고 있었을까? 그녀가 쓴 이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삶을 지켜낼 힘이 될 것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인내와 고통으로 단련된 올곧은 지조와 천성적인 선량함, 표면보다 이면에 더 깊이 새겨져 있는 올바른 가치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자 끊임없이 애쓰는 배려의 마음, 욕망을 절제하고 원칙을 꿋꿋이 고수해나가는 심성, 아주 적게 갖고 있으면서 더 적게 갖게 되더라도 만족할 줄 아는, 역경과 고난이 닥쳐와도 무릎을 꿇거나 악의를 품지 않고, 사색과 자성과 내면의 회복 능력으로 대처하며 성장하는”(같은 글 인용) 패니 프라이스는 내가 읽었던 모든 작품의 주인공들 중에 가장 매력적이다. 내가 삶의 고삐를 강하게 다시 쥐게 만들 정도로.

 

출처 픽사베이

신데렐라 모티프를 가졌기에 패니 프라이스는 (미운오리새끼 시절을 가진) 백조로 보통 비유되지만, 나는 어쩐지 부엉이/올빼미가 더 많이 생각난다. 아무래도 미네르바의 상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고 지혜를 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