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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 감상 : 발레계의 막장 치정극

 무려 5년만에 올라온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발레계의 블록버스터이자 막장 치정극이다. 많은 인원이 필요한 대작! 기존 경험자가 많이 나갔기에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당초엔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 내한 예정이었으나 안일한 행정 처리로 무산됐다. 대체 캐스팅이 신승원 허서명이라 굳이 취소하지 않았다. 신승원의 도도한 감자티를 극찬한 적 있기에 니키아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오랜만의 클래식 주역이기에 보고 싶었다. 허서명은 꾸준히 호감이기에 데뷔를 보고 싶긴 했다. 나중에 감자티도 발표됐는데 심현희 무용수! 이 조합이라니? 갑자기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어느 좌석을 예매했는지조차 기억이 날아간 채로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여차하면 분위기만 본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이런 자리를 예매했는데 다시 구할 생각도 안 했다니! 솔로르가 가벼운 점프로 등장하고 니키아가 베일을 쓰고 등장하는 장면마다 후회했다. 왜? 1층 중블이 나한테 없지? 망연자실하게 망원경을 들었다. 라 바야데르를 2층에서 보는 건 처음인데도 집중도가 높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4월 29일 목요일 공연은 내 취향을 개조 시킨 라 바야데르였다. 5월 2일에 동일 캐스팅 티켓을 또 구했다. 5월 1일 토요일 수석무용수 박슬기 김기완 페어도 감상했으며 그 역시 만족도가 높았으나, 2회차(이 페어 첫공이자 막공을 본 셈)를 찍은 목요일과 일요일 중심으로 서술하겠다.

동일 캐스팅 두 번째 감상에서는 연기 디테일 잘 보이고 감정 무르익으면서 동작도 부드러워지는 정도를 기대했다. 그런데 연기가 수정된 듯 다른 공연을 보는 기분이라 신기했다. 한 사람만 달라진 게 아니라 세 사람 다 달라진 느낌으로 다가왔는데 겉도는 배역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프로그램 E-Book 출처. 새로운 사진을 찍지 않았는지 감자티 사진이 신승원 무용수!

목요일 신승원 니키아 : 신비롭고 사연이 많은 무희라는 인상이다. 등장하는 순간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브라민이 다가올 때도 차분하고 신중한 태도로 거절한다. 타락한 중년 제사장이 연상되는 그를 정중하게 거절한다. 무희 일에 긍지를 가진 니키아였기에 감자티 공주가 천한 무희라는 식으로 모욕하자 못 참고 공격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결혼식에서는 체념한 모습이었다. 감자티와 붙어먹고 노닥거리는 솔로르를 보자마자 아, 마음이 완전히 떴구나! 직감하며 절망하는 연기를 보여줬다. 연적과 연인의 결혼식에서 춤을 추는 기구함, 더없이 서글픈 감정을 삼키면서 절제미 있는 춤을 췄다. 꽃바구니를 받아들고도 끝까지 의심한다. '이제 와서 나한테 꽃 보낸 저의가 뭐지?' 불안의 끈을 놓지 않고 상황을 관찰하면서 춤을 추느라 심란한 표정과 주저하는 동작을 보여줬다. 희망 한 톨도 남기지 않은 춤, 독사에게 물렸을 때의 고통이 인상적이었다. 해독제를 보여주는데 몸 돌린 솔로르를 보고 희롱당하고 배신당한 삶을 저버린 게 아닐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느낌이었다. 3막은 순전히 환각이고, 실제 니키아의 유령이 아니다. 원망하는 마지막 순간보다 더 싸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휘몰아치는 턴까지 그 페이스를 유지했다. 

일요일 신승원 니키아 : 더 섬세하고 처연한 무희! 솔로르가 기다린다는 사실에 설레는 표정을 짓는데 가냘픈 소녀 같았다. 이 날 브라민은 속세를 반만 떠난 혈기왕성한 청년 제사장 이미지였다. 그를 노려보는데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목요일의 니키아가 연상으로 보였다면 일요일은 더 알콩달콩한 또래 커플! 관계에 문제가 없었기에, 감자티가 초상화를 보여줄 때 믿을 수 없는 감정이 짙게 묻어나온다. 자기도 모르게 공주에게 칼 들이댔다가 바들바들 떨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게 실감났다. 감자티 옆에 앉은 솔로르를 보고 확인사살 당한 나머지 절망해서 흐느끼듯이 춤을 췄다. 팔 움직임에 눈물이 방울방울 담겨서 애처로웠다. 꽃바구니를 받고선 '아직 날 잊지 않았어!' 내심 기대하면서 감자티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며 춤추다가 독사에 물려서 충격에 빠진다! 솔로르가 다가올 것처럼 빤히 쳐다보더니 멈칫하고 돌아서자 고통과 비탄에 잠겨서 숨 몰아쉬면서 헐떡거리는데 실제로 아픈 몸처럼 느껴질 만큼 리얼한 연기였다. 결국 약 던지고 비장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줬다. 감정적 고조가 매우 드라마틱했다! 3막은 솔로르 기억 속의 환상답게 맑고 투명한 모습으로 솔로르의 죄책감을 고조시켰다.

목요일 허서명 솔로르 : 오래된 연인. 설렘이 다소 사라지고 권태기가 온 느낌이다. 그래도 평온함을 주는 상대라서 좋아한다. 게다가 예쁘고 우아하잖아! 비밀 연애도 짜릿해! 근데 어? 라자 왕이 딸과 결혼을 하란다. 제가 결혼이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감자티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마치 습자지처럼 가볍고 바람둥이 기질이 보이는 전사다. 그의 두둥실한 동작과도 잘 어울린다. 앗? 미모의 공주와 재물과 권력이 나한테 다 굴러온다고? 이득인데? 짧은 시간에 머리를 굴린다. 진정한 사랑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한 솔로르다. 얼빠이자 금사빠 노선! 감자티가 원래 이상형이었던 사람처럼 구는데, 결혼식 파드되 때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날아다닌다. 철딱서니 없는 꼬마신랑마냥 들뜬 모습이었다. 니키아가 걸리긴 하지만, 또 감자티 얼굴 보면 방긋 웃는다. 빠른 환승! 니키아가 춤을 춰도 끝까지 외면하고, 죽음을 확인하고도 회피하며 뛰쳐나간다. 아편을 빨고(!) 환각을 보는 3막도 죄책감보단 약에 취해서 몽롱해진 인상을 줬다. 내가 헛것을 보나? 겁에 질려서 벗어나고자 춤을 추면서 자기합리화를 하는 솔로르로 보였다. 이 솔로르는 깨어나면 감자티와 잘 지낼 것 같았다. 평소 이미지로는 선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는 걸 상상했는데 예상과 달라서 즐거웠다. 착한 얼굴에 그렇지 않은 태도! 망령들의 왕국에서는 이질적인 세계에 걸맞게 몽롱한 인상을 줬다.

일요일 허서명 솔로르 : 몽글몽글 사랑이 피어나는 연인. 다정다감하게 눈 맞추는 파드되를 보자마자 이번엔 해석이 조금 다른가 싶었다. 결혼 제안받았을 때 감자티 공주의 미모에 잠시 흔들린 건 맞지만 당혹스러워서 거리를 둔다. 제안을 거역할 수 없지만, 난 연인이 있는데? 갈팡질팡한다. 목요일보다 더 감성적인 솔로르가 됐다. 니키아가 축하의 춤을 출 때 괴로워하며 응시한다. 그 와중에 왕 눈치도 보고 감자티를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예 갈아탈 수도 없기에 고통스럽다. 시선을 못 떼다가 해독제를 보여주는 순간 휙 돌아선다. 이 새끼가! 청순한 얼굴로! 그래놓고선 죽음을 확인하고 크게 좌절한다. 3막에서는 좋았던 시절을 되짚으면서 갈망하는 게 느껴진다. 다신 못 돌아오는 시간을 떠올리는 회한이 짙게 느껴지는 솔로르였다. 죽어간 니키아의 연기와 합이 훌륭했기에 나올 수 있는 감정선! 전체적으로 비탄에 잠긴 이미지가 강했으며 음악을 풍부하게 타며 춤췄다.

목요일 심현희 감자티 : 생동감을 담은 공주님으로 등장! 고아한 자태로 무대를 홀린다. 난 공주다! 사랑 담뿍 받고 금지옥엽으로 자라서 자신감 넘치고, 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공주님이었다. 마침 아버지가 결혼 상대를 보여주셨는데 늠름해! 앗, 내가 맘에 드는구나! 이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상상했는데 숨겨둔 여자가 있다고? 잠시 슬퍼하지만 굴하지 않는다. 왜냐면 세상은 내가 원하는대로 흘러가니까! 그 무희란 아이를 데려왔는데 꽤 반반하다. 그래도 난 공주인데? 어차피 그는 나한테 빠졌다니까? 보석 팔찌 주면서 회유했는데 안 먹혀서 잠시 놀라다가 서서히 흑화하는데 눈빛이 확 변해서 놀랐다.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무용수였다니!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본인의 신분을 강조한다. 그간 부드럽고 청초한 캐릭터로 많이 봐서 흑조보단 백조가 어울리고, 지젤이 떠오르는 무용수라고 생각했는데 거만하고 교활한 역도 잘 소화하다니! 솔로르가 상념에 빠질 때마다 시선을 고정시키는 카리스마는 마음을 뺏을 수 있다는 자만이 느껴졌다.

일요일 심현희 감자티 : 표정부터 달라진 등장이었다. 태생부터 오만한 자아도취 공주님. 내가 이 나라를 지배한다고 외치는 느낌이다. 목요일보다 위엄 있고 에너지가 강했다. 니키아를 몰아붙일 때 잠시도 비굴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고 짜릿한 긴장감이 무대를 적셨다. 자비로운 척 웃다가 뜻대로 구워삶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불타는 눈빛으로 노려본다.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데 와, 무시무시한 살의가 다가왔다. 이 버전의 솔로르는 좀 우왕좌왕하는 중이라서 확 잡아두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자 조바심 내는 면모도 보여준다. 솔로르를 불안하게 쳐다보지만, 눈이 마주치면 특유의 도발하는 눈빛으로 변하며 공주다운 위엄을 보여줬다. 더 놀랄 게 남았나? 발레 감자티 따로 만들어도 될 만큼 입체적이고 존엄한 공주님이라서 더 충격적인 무대였다. 작은 체구에서 뿜는 카리스마,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 드높은 쥬떼, 박력 넘치는 이탈리안 훼떼가 아직도 생생하다. 왜 아직 드미 솔리스트지? 단장이 커튼콜 때 올라와서 수석으로 승급시켜도 인정할 감자티였다. 선례도 있겠다, 이쯤이면 두 단계 승급시켜도 되지 않을까? 나라면 없는 TO도 만들겠다.

목요일은 살짝 비틀려서 신선한 무대였다면, 일요일은 청초하고 구슬픈 정석 멜로였다. 아마 라 바야데르를 처음 본다면 막공 쪽이 더 취향일 듯한데, 난 목요일을 더 많이 곱씹었다. K-막장 드라마로 치면 처량맞은 예술인 여주, 능력 좋은 남주, 당당한 재벌가 막내딸 약혼녀 조합인데, 남주가 갑자기 막내딸한테 진심으로 빠져서 여주를 죽음으로 몰아서고 마약(아, 심의에 걸리려나? 그럼 알코올 정도로 치자!) 중독에 빠지고, 대책 없는데 중독성 높은 드라마 같다. 막공을 봤기에 목요일을 다시금 또 추억할 수 있었다. 연기장인들만 모여서 여운이 오래 남았다.

내 취향 왜 이렇게 됐지? (느닷없이 취향을 개조 시킨 분은 이후의 무대를 책임지도록 하세요!) 솔로르는 발레 남주 중 최악, 이해 어려운 쓰레기다! 지그프리드 왕자는 마법사와 딸이 대놓고 속이는데 어쩔 도리가 있겠어? 알브레히트도 용서는 구하잖아? 솔로르 너는 답 없다 주장하고 니키아도 미련해 보였던 사람이었는데 집중하다 보니까 어느새 설득당했다. 음악과 동작이 계속 떠오르는 일주일이었다. 나도 솔로르처럼 환각을 보는 걸까?

깜찍한 앵무새 춤!

토요일의 박슬기 김기완 페어를 조금 추가하겠다. 경험자답게 능수능란해서 상상하는 라 바야데르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김기완 솔로르는 용맹하고 담대하면서 날쌘 전사 느낌.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은 호랑이를 잡아오지는 않지만, 이미 잡아서 바쳤을 것 같은 추진력이다. 뿌듯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솔로르가 등장할 때 전사들이랑 함께 오른쪽에서 사선으로 크게 점프하는데 허서명 솔로르의 경우엔 둥실둥실 날아오른다. 젊고 상쾌한 전사라는 이미지. 반면에 김기완 솔로르는 좀 더 관록과 절가 있는 편이다. 안무 동작도 약간 달랐다. 아마 둘의 스타일 차이도 있겠고, 신입 수석과 경력 쌓인 수석에서 오는 분위기도 있을 텐데 어느 쪽이 더 취향이라고 꼽을 수 없을 만큼 개성이 넘쳐나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장면이었다.

1막 파드되는 박슬기 김기완 회차가 더 찐득하고 다정한 분위기였다. 달콤한 멜로 눈빛으로 니키아 쳐다보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파트너의 라인을 더 깔끔하게 만들어주며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도록 맞춰주는 게 느껴졌다. 왜 슬기완 기다리는 팬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둘 다 서로를 원하는 표정을 담뿍 담아서 활짝 웃고 아이컨택을 하면서 촉촉한 춤을 보여줬다. 2막 결혼식 파드되 때 허서명 솔로르는 일단 공주에게 맞춰서 웃는다면 더 김기완 솔로르는 웃음을 보이지 않으며 고뇌하는 표정이었기에, 깊은 후회에 잠긴 2막 후반부로 연결이 매끄러웠다. A블록을 구해서 솔로르 행동을 잘 관찰할 수 있었는데, 심장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하면서도 우유부단한 솔로르라 비겁하게 회피했다. 비통한 표정이 있었기에 3막에서 회한에 잠겨 니키아를 그리워하며 군무 사이로 망령을 쫓는 애절함이 설득력 있었다. 스카프 파드되는 아슬아슬한 부분인데 역시 노련하게 서로를 배려하면서 호흡을 보여주고 자연스레 마쳤다. 안정적인 파트너십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군무가 정돈돼서 놀랐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서 움직이는 앵무새 춤, 신비롭고 너울너울한 스카프 춤이 기억에 남는다. 스카프 솔리스트도 잘 어울렸다. 아,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아랍계 아동들의 블랙페이스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서양인이 표현한 이국적인 동양답게 오리엔탈리즘이 담긴 작품이라 불편한 요소를 아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보송보송한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자 맑고 똘망한 표정이 잘 보였다. 아역들 피부가 상할 일도 없겠단 생각에 안심이 됐다.

아라베스크를 수없이 하면서 가파른 경사를 내려오는 32명의 쉐이드 군무는 특히 아찔한 장면이다. 오랜 공백을 딛고 신입단원까지 세웠는데 경험 많은 무용수가 발레 마스터로 전환된 덕분인지 내 예상보다 훨씬 일정했다. 조형미 넘치는 발레 블랑의 진수를 완수해낸 군무진에게 박수를 보낸다. 바뀐 지휘자 덕인지 항상 아쉽던 코리아 심포니의 연주도 유려했다. 아련한 하프가 기억에 남는다.

최종은 아니다. 저 상태에서 몇 명 교체되면서 중복 캐스팅이 더! 더! 늘어났다! 색으로 표시하려다가 포기!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을 적자면, 다수가 겹치기 캐스팅으로 무대를 섰다. 2막에서 발랄한 몸짓고 귀여운 표정으로 아이들을 놀리며 묘기를 보여주던 물동이 소녀 김희선은, 3막에서 표정을 지우고 산뜻한 바람 같은 몸짓의 쉐이드가 됐다. 감자티를 맡은 심현희는 다른 날 레드 4인무에 등장해서 결혼식을 빛내고, 발란스가 돋보이는 마지막 쉐이드도 춘다. 그런데 세상에, 니키아와 감자티를 다 맡은 수석무용수 박예은의 경우에도 리드하듯 강인한 첫 쉐이드로 나왔다! 싱그러운 스카프 춤을 춘 조연재도 쉐이드를 깨끗하게 소화했다. 한 무용수의 부상으로 원 캐스팅이 된 곽화경을 제외하고는 한 명씩 변동을 보였는데, 거의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오는 무용수들이었다. 곽화경 역시 블루 4인무와 스카프 춤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였다. 주역급은 2층에서도 티가 나는 움직임이라 망원경을 쓰면 역시나 익숙한 얼굴. 언더스터디가 없는 걸까? 쉐이드 트리오 정도는 신인을 더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또 톨로라그바는 내가 본 회차의 주역들인 허서명, 김기완이 서로 교차해서 섰다. 어제 주역했던 무용수가 오늘의 주역 옆에 서서 짤막한 마임을 한다! 수석이 전사들과 군무를 하면서 등장하고, 왕 옆에 조용히 앉아서 관전한다. 비중 낮은 단역이라도 관객이 더 집중하게 만들겠다는 큰 그림일까? 이전에도 이 역을 맡은 김기완은 그 와중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심지어 다른 날은 노예도 한다. 진정한 수석 낭비다! 아, 공연 수당을 더 받아가라는 배려? 여러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중인데, 역시 다양하게 기회를 주는 게 좋겠다.

2013년 초연 당시 첫 쉐이드로 주목받았던 박예은은 2021년에 또 쉐이드 바리에이션을 춘다. 참고로 두 번째 쉐이드는 신승원. 지금은 볼 수 없는 김지영, 이동훈 페어의 호흡과 칼군무가 멋진 영상.

일인다역을 매번 다른 색채감으로 표현한 무용수들에게 감탄하긴 했으나, 심한 겹치기 캐스팅은 지양하길 바란다. 내실 갖춘 단체가 되려면 눈에 띄는 몇몇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탄탄한 신인을 발굴해야 한다. 특히 솔리스트 역할은 차세대 주역을 위한 밑바탕이다. 다섯 번이나 전체 캐스팅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여성 군무진이 부상을 당하면 코르드나 연수단원으로 캐스팅이 바뀌었는데 전혀 거슬리지 않게 잘 소화했다. 기본기를 증명한 셈이다. 다음 공연에서는 새로운 얼굴에게도 기회를 더 주길 바란다. 투혼한 단원들의 부상 케어도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실로 오랜만의 만족스러운 공연이었으나 행정과 인력 운용은 아쉬움이 남는다. 

역시 국립발레단 규모엔 화려한 클래식 발레가 어울린다. 기존 레퍼토리의 알찬 활용과 함께, 단원들의 기량을 두루두루 높일 만한 신작을 가져온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무용수들의 개성에 어울리고 관객들에게도 만족을 주는 공연이 더 늘어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