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발레의 대명사 <지젤>은 가을과 특히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1막은 노릇노릇 무르익은 흙내음 나는 농가, 2막은 스산한 무덤가를 보여준다. 1막은 햇빛 쨍쨍한 낮, 현실 세계, 수확기의 생명력. 2막은 달빛 내려앉은 밤, 영혼의 세계, 삶과 죽음의 경계다. 일교차가 큰 가을 날씨에 걸맞는 레퍼토리인데, 이번 시즌은 특히 절묘했다. 할로윈데이 시즌과 지젤이 겹치다니! 딱 맞닿는 테마다!
지젤은 어떤 무용수가 표현하는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10월 30일 6시는 홍향기-이동탁 페어였는데, 이 조합의 지젤은 처음이었다. 티켓팅을 한 다음에 뜬 캐스팅인데, 안정적으로 볼 수 있는 페어인 만큼 기대를 걸었다.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스테레오 타입에서는 다소 벗어난 무용수라고 생각됐다. 전형적인 이미지도 좋지만, 기존 이미지랑 다른 무용수들의 무대는 또 의표를 찌르는 재미가 있다. 물론 확고한 실력이 뒷받침된다는 전제 하에.
어느 정도 의외성을 기대하고 갔지만, 그래도 무용수의 평소 모습에서 어느 정도 예측되는 범위는 있기 마련이다. 홍향기는 건강한 활기, 이동탁은 역동적인 에너지가 떠오르는 무용수다. 그러나 노블 역할 역시 본인만의 해석으로 잘 나타내기에 훌륭한 테크닉으로 감정을 드러내겠거니 했다. 그리고 둘은 내 예측 범위를 뛰어넘었다.
이동탁의 알브레히트는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귀족이었다. 시종 윌프레드의 호위를 받으며 광택 넘치는 붉은 의상을 걸치고 등장하는데 이질감을 자아낸다.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장치. 이전에 무리지어 등장한 농민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프롤로그격 연출이 좋다. 알브레히트는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집에 들어가서 농부 차림새로 나온다. 그의 그릇된 행동을 저지하려 애쓰는 윌프레드 역할 루이스 가드너도 풋풋한 연기가 잘 어울렸다.
알브레히트는 순전한 호기심으로 지젤의 집을 찾았는데 친화력이 높은 지젤은 그에게 푹 빠진다. 지젤의 비극은 여기서 생겨난다. 익숙한 마을 사람보다 새로 등장한 사람을 믿는 것! 홍향기의 지젤은 외향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그저 놀이일 뿐. 둘의 강렬한 개성이 잘 맞물렸다. 꽃점을 치면서 지젤을 속이는 게 복선이다. 이 남자는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하는구나! 위험을 감지한 힐라리온이 지젤을 말리러 오자 위협하며 쫓아낸다.
여기서 힐라리온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겠다. 힐라리온은 지젤을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사냥꾼이다. 지젤을 본 사람들은 두 남자 중 어느 쪽이 더 나쁜지에 대해 토론하곤 한다. 나는 둘 다 나쁘다고 생각한다. 지젤의 감정을 무시하고 들이댄 쪽도, 신분과 약혼 사실을 숨기고 접근한 쪽도 참작의 여지가 없다. 많은 사람이 힐라리온과 지젤이 이어졌어야 한다며 불쌍하게 여길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지젤의 선택을 존중하며 감상하는 쪽이었다. 힐라리온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다. 아직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오랜 세월, 지젤을 보면서 힐라리온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처음이었다.
이 풋내기 힐라리온은 지젤과 오랜 친구 사이 같다. 소꿉친구부터 시작해서 성장을 보고 자랐다. 힐라리온은 당연히 언젠가 지젤과 결혼할 줄 알고, 마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까 힐라리온은 혼자 연애한 거였다. 지젤 집 앞에 걸어둔 꽃다발을 집어 들고 끌어안은 채로 웅크린 모습에선 서투른 소년의 청승이 느껴졌다. 지젤은 조용히 마음을 전하면 차츰차츰 스며들 상대가 아니었다. 이게 힐라리온의 실수다! 하늘에 사랑을 맹세하고, 반지도 주고, 꽃점도 치고, 대놓고 표현했어야 한다. 지금껏 당연히 공인된 사이인 줄 알았다가 웬 수상한 남자와 노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듯했다. 미리 고백을 했어야지! 물론, 지젤이 받아줬으리란 보장은 없다. 뭐, 당연히 찼겠지. 친구끼리 무슨 소리야? 하면서.
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이고,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 밑에서 자란 지젤은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의도로 접근했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없었으리라.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지젤은 알브레히트의 약혼녀 바틸드의 마음도 녹인다. 지젤과 누군가가 굳이 이어져야 한다면 바틸드라고 본다. 둘의 교감이 탁월한데! 바틸드는 평민인 지젤이 옷을 어루만지는데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지젤은 화려하고 우아한 바틸드의 관심을 끌고자 옷에 자수를 놓고, 춤을 잘 춘다고 어필한다. 이쯤이면 지젤은 새로운 사람을 다 좋아하는 게 아닐까.
1막의 볼거리를 꼽는다면 포도 축제에서 보여주는 지젤 바리에이션과 패전트 6인무다. 마임과 연기가 많은 1막에서 춤 위주로 흘러가는 장면이다. 지젤은 여왕으로 뽑힌 만큼 또렷하고 확실한 솔로를 춘다. 특히 음악을 끝까지 잡고 쓰는 게 인상적이었다. 메인 파드되로 등장한 전여진은 아름다운 라인을 보여줬다. 또 오타 아리카와 사공다정의 화사하고 발랄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알브레히트가 귀족이란 단서를 찾아낸 힐라리온은 지젤에게 호소하듯 말한다. 저 사람을 사랑해? 진짜? 정체는 알고? 지젤이 너무 확고한 사랑을 답하자 구해줘야겠단 생각에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귀족들을 불러모으고 정체를 폭로한 것. 지젤과 그저 놀아보려고 했던 알브레히트는 원래 반려자인 바틸드에게 다가간다. 염치 없는 얼굴로, 변치 않는 충성을 맹세한다. 이 여자랑 결혼해서 부와 명예를 누릴 거야. 내가? 평민을 진심으로 상대할 리 없지. 그런데 결혼하려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충격받은 지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외면하는데, 그 표정이 발군의 연기였다. 이동탁의 해석은 비겁한 쓰레기 노선이었구나!
1막의 하이라이트인 광란의 춤. 홍향기에게 가장 의외성을 엿본 장면이었다. 넋을 반쯤 놓고 눈빛이 잔잔하게 맛이 간 채로 움직인다. 동적이라기보단 정적인 매드 씬으로 다가왔다. 평소 지고지순하지 않고 사랑에 미치지도 않기에 더 분리해서 연기할 수 있었다는 인터뷰 내용이 퍼뜩 떠올랐다. 지젤은 순수한 소녀의 사랑이지만, 30대가 된 무용수의 원숙한 연기가 더 돋보이기도 한다. 지젤이 정신줄을 놓은 상황에도 철저히 회피하는 알브레히트. 결국 지젤은 목숨을 잃는다. 알브레히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쩔 줄 모르다가 힐라리온을 탓한다. 어머니를 맡은 이가영의 연기도 뛰어났다. 비탄에 잠겨서 지젤을 끌어안으며 울부짖는다.
1막 내내 사랑보단 놀이였던 알브레히트가 2막의 후폭풍은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해졌다. 알브레히트는 2막에서도 진정한 속죄보단 알량한 죄책감을 몰아내고자 무덤에 찾아온 듯했다. 이동탁은 시종에게 불을 켜게 시키며 밤에 찾아온 건 사랑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왔다고 해석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중 삶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알브레히트였다.
웬만하면 힐라리온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죽이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리앙 시후아이의 힐라리온은 가엾단 인상이었다. 진심으로 반성하러 왔는데 윌리들에게 둘러싸였다. 간절하게 춤을 추면서 용서를 구하지만, 결국 생명을 소진한다. 힐라리온의 빠른 퇴장이 아쉬울 줄이야! 물론 지젤이 힐라리온을 구해줬어야 한단 의견엔 여전히 반대한다. 좋아하니까 받아주고, 도와줘야 한다는 말에 동조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힐라리온은 마을로 돌아가서 건실하게 살았으면 했다.
남자를 보면 죽도록 춤을 추게 명령해서 숨통을 끊어내는 유령 윌리들은 또 누구 걸려드는 남자 없을까 찾으며 뛰어간다. 이 장면에선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미처 숲을 빠져나가지 못한 알브레히트도 걸렸다. 역시 똑같이 처단하려고 할 때 지젤이 뛰어나와서 막아선다. 그리고 윌리들이 힘을 못 쓰도록 십자가 쪽으로 알브레히트를 데려간다.
지젤의 춤은 합리화였다. 서글프고 억울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삶도 죽음도 헛되기에, 자신을 애도하고자 살리기를 선택했다는 인상. 윌리답게 가볍고 서늘한 점프에서 허무함을 자아냈다. 이동탁은 공기 중에 부유하듯 두둥실 뜨는 리프트를 말끔하게 소화하며 딱 붙는 호흡을 보여줬다. 살고자 하는 집착이 가득한 처절한 춤. 알브레히트가 죽도록 춤을 추는 하이라이트를 앙트르샤(수직 연속 점프) 브리제(사선으로 가로지어서 점프) 중 어느 테크닉으로 선보이는지는 지젤을 아는 사람들의.궁금증인데 이동탁은 미르타에게 떠밀리는 듯한 브리제를 보여줬고, 캐릭터와도 잘 맞아서 만족스러웠다. 흰 타이즈라서 라인이 더 잘 보이는 점도 한몫했다. 여분의 삶을 위해서 힘을 아껴둔다는 느낌.
이다정의 미르타는 지젤을 점점 딱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껏 별별 사연을 다 거쳤지만, 넌 어쩌다가 저런 인간한테 걸렸니. 꼭 살려야겠어? 명령하다가 기가 막힌 느낌. 아침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알브레히트는 새로 얻은 삶에 안도한다. 사라지는 지젤을 보면서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걸 피부로 느끼는 듯했다. 무덤가에 꽃을 툭 떨구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개과천선해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 지젤은 다음 생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서 아무나 믿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싶었다.
30일 저녁 6시의 지젤이 얼얼한 매운 맛이었다면 31일 낮 2시의 지젤은 부드럽고 순한 맛에 가까웠다. 막장드라마와 홈드라마의 차이? 손유희-이현준 페어는 보통 지젤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에 자신만의 기운을 입혔다. 손유희의 지젤은 섬세하고 소녀스러웠다. 등장하는 순간에 이미 사랑에 빠질 준비를 갖춘 표정.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매료된, 천진난만한 소녀라고나 할까. 어머나, 이 문을 두드린 사람은 누굴까? 운명적인 만남이었으면 좋겠다! 그 마음을 읽은 듯 나타난 알브레히트에게 첫눈에 반한다. 꽃점에 사용한 데이지의 꽃말처럼 순수한 지젤이다. 연한 하늘색 의상의 홍향기와 달리 선명한 파란색 의상이었는데 주역별로 의상 디테일이 다른 게 흥미로웠다. 자그마한 체구에 쨍한 색, 그러데이션 치마라 멀리서도 눈에 띄고 친구들 틈에서도 잘 보였다.
얼굴이나 구경하자는 마음으로 찾아온 알브레히트 역시 지젤이 취향에 맞아서 충동적으로 사랑을 맹세한다. 이현준의 알브레히트는 뒷일은 제쳐두고 현재 마음을 따라서 행동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 따로 결혼 따로 분리하는 가치관을 지닌 귀족이다. 들키지 않는 선에 즐기면 그만이지, 뭐. 한두 번 저지른 솜씨가 아니다. 능수능란한 태도로 순진한 지젤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손유희의 눈높이에 맞춰서 몸을 낮춰주는 서포트는 알브레히트의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의 힐라리온은 딱 정석이었다. 지젤에게 무작정 마음을 강요하는 인물. 키 크고 건장하고 마초 기질 강한 사냥꾼. 투닥거리는 친구 같았던 전날과 확연히 다른 조합이었다. 지젤이 무서워하고 싫어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몰아붙인다. 손유희의 지젤은 순박하면서도 또 호불호가 몹시 강한 소녀다. 알브레히트를 보던 달콤한 눈빛, 온화한 손짓은 온데간데 없다. 불쾌한 눈빛, 껄끄러워하는 몸짓. 고분고분하고 얌전할 줄 알았던 지젤에게 거부당하니 자존심에 타격도 받고, 어디서 나타난지 모를 놈팽이에게 질투심이 생긴다. 그리고 알브레히트의 도회적이고 세련된 행동을 의심하며, 둘을 갈라놓을 방법을 강구한다.
손유희의 지젤은 좀 더 수줍음이 많고 조심스럽다. 성심껏 팔을 움직이며 친구들에게 춤을 제안하고, 심장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표현한다. 바틸드의 화려한 의상을 어루만지다가 멀리 도망가는 모습, 바틸드의 손에 키스를 하려다가 저지당하자 머뭇대는 동작에서 신중한 성정이 드러났다. 무대로 오랜만에 컴백한 김채리의 바틸드는 전날의 자비롭던 한상이와 달리 좀 선을 긋는 귀족이었다. 귀여운 평민 소녀에게 아량을 베풀지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건 원치 않는다. 또 31일의 메인 패전트는 서헤원-강민우 페어였는데 비주얼 합이 잘 맞고 매력적이었다. 특히 서혜원은 호흡이 긴 발란스를 자랑했다. 전날 힐라리온인 리앙 시후아이도 패전트로 행복한 춤을 보여줬다. 6인무는 더 다양한 무용수를 감상할 수 있고 풍성한 게 장점이지만, 자칫 산만해지기 쉽고 실력에 편차가 심하거나 한두 명이 거슬리면 조화가 깨지는데 전체적인 합이 뛰어났다.
알브레히트에게 지젤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힐라리온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야겠다고 결심한다. 집에서 찾아낸 칼을 꺼내고, 뿔피리를 불어서 귀족들을 소환한다. 하필이면 사람 많은 축제에서 본인이 속았단 사실을 알게 된 지젤. 마지막 희망으로 알브레히트를 보지만 바틸드에게 변명하느라 여념이 없다. 신경 쓰지 마. 내가 잠시 머리가 돌았었나 봐. 웃으며 안심시킨다. 지젤이 바틸드에게 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다고 호소하지만, 바틸드는 딱하게 쳐다보며 진실을 알려준다. 지젤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알브레히트의 발치에 바틸드에게 받은 목걸이를 툭 던진다.
손유희의 매드 씬은 드라마틱해서 정보다 동에 가까웠다. 아예 제대로 실성했다는 느낌. 꽃점을 치고 사랑을 속삭이던 음악이 흐르면 허망하게 실소를 터뜨리며 지난 일을 복기해보고, 풀어헤친 머리를 쥐어뜯고, 손가락질하며 또 커다랗게 웃는다. 칼을 들고 뛰어다니며 힐라리온을 원망하고 알브레히트에게 일말의 기대를 가져보지만 허사였다. 지젤 데뷔에 이만한 광기를 보여주다니! 어머니 역할 무크투야 무크볼트의 열연이 실감났다. 지젤이 죽고 나서야 다가오는 알브레히트를 거세게 노려보며 밀친다.
할로윈데이 당일과 어우러져 더 분위기 있었던 윌리들의 숲. 미르타는 전날 어머니였던 이가영이었는데 커다란 키와 카리스마 있는 존재감이 미르타에 적역이었다. 어떤 상처로 마음을 닫은 미르타가 됐을까? 사연이 궁금해졌다. 단호한 마임으로 윌리들을 깨우고 리드 윌리 둘을 인도하며 객석을 압도하는 춤을 춘다. 끝이 없을 듯 펼쳐지는 아라베스크와 신비로운 파드부레, 파르스름한 달빛에 젖은 군무는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미르타는 윌리 지젤을 소환한다. 체구 차이가 많이 나서 여왕과 신입의 대비감이 확고했다. 손유희의 윌리는 인간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지젤은 살면서 내내 외로웠던 게 아닐까? 인자한 어머니, 다정한 친구들, 구애자까지 다 있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있었던 것 같다. 알브레히트가 처음으로 마음이 통한다고 믿었던 상대였던 것. 그렇기에 알브레히트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알아달라는 듯 존재감을 표출한다. 그리고 윌리들에게 잡혀왔을 때도 온몸을 다해 막는다. 어디서 이런 에너지가 나왔나 싶을 만큼. 잠시나마 외로움을 해소시켜주고, 사랑을 알려줘서 고마웠다며 에너지를 소진시켜가며 춤추는 지젤을 보면서 알브레히트는 사람의 감정과 생명을 소홀히 여겼던 과거를 후회한다. 이쪽은 좀 더 겸허히 반성하며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이현준은 진회색 타이즈를 신어서 다리 라인이 덜 보였는데 파드되에서 지젤이 두둥실 떠다니는 효과는 확실했다.
생전에도 지젤은 자기주장이 강했다. 몸이 약하니 무리하지 말라는 어머니 앞에서 굳이 춤을 추며, 스스로 사랑을 선택한 그 성격 그대로, 윌리가 된 다음에도 의지를 다해 미르타의 명령을 거역한다. 여리지만 고집 센 1막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이 외골수적인 면모는 알브레히트의 죄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살아남는 게 더 두렵지 않을까? 지젤의 용서야말로 처절한 복수의 시작이다.
이현준 알브레히트도 브리제로 움직였는데 힘이 소진된 모습을 표현했다. 동일한 안무라도 캐스팅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게 발레의 묘미다. 파드되도 좀 더 포용하는 이미지였다. 지젤은 계속 알브레히트를 살피며 처연한 춤을 추고, 알브레히트는 과오를 뼈저리게 후회한다. 마지막으로 안아주고 사라지려는 지젤을 쫓아가서 잡아들지만 이미 늦은 일. 몸은 무덤으로 빠지면서 치맛자락은 알브레히트에게 끝까지 남기는 노련한 연출이 좋았다. 그마저 사라지자 알브레히트는 상실감에 오열하며 무대를 가로지르다가 무덤에 백합을 떨군다. 손유희의 지젤은 이제 온 마음을 다 보여줬으니 삶에 미련이 없어서 윌리도 되지 않고 안식을 취하지 않을까 싶었다. 남겨진 알브레히트는 평생 지젤의 망령에서 못 빠져나올지도 모르지. 개인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살아남은 자의 무게감을 느껴라!
양일 캐스팅이 확고하게 달라서 두 번 보며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30일은 팽팽하게 고조돼서 심장이 쿵쾅거렸고, 31일은 아련하게 물들면서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다. 지젤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 유쾌하게 담소를 나누는 귀족을 잘 표현한 객원 무용수들, 으스스한 달밤을 박력 있게 메워준 윌리들. 모든 이가 온 마음을 다해서 쏟아붓는 열정에 압도당했다. 할로윈데이의 지젤, 탁월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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