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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오늘도 #3B8CCF

2021년 11월

벌써 올해도 12월에 들어섰지만, 조심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하다. 연말 행사가 거의 사라져서 마치 시즌제 직업처럼 스케줄이 조용해졌다. 아직 작은 이벤트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한 해의 큰일들이 거의 지나갔고 지금은 여름 야외 공연이 한창일 때보다는 확실히 여유가 많아졌다.

지난달에는 속해있는 앙상블의 창단 연주회가 있었다. 여기 오고 처음으로 넉넉한 연습 기간을 가지고 준비했다. 연주자 스케줄과 주최 측의 예산 문제로 늘 준비와 연습 시간이 촉박했는데 이번에는 여러 상황이 잘 맞은 덕분에 2주간 집중 연습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음악과 악기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본인 음악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함께 모여 서로의 다름을 충분히 수용하며 같이 섞여들었고, 친근감이 높아질수록 합주 완성도도 조금씩 높아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준비 시간이 재밌었고 주최 측에서도 열심히 잘 일해준 덕분에 전석 매진으로 공연이 잘 끝났다. 

이 앙상블은 사실 락다운이 풀리기 이전에 각자 연주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것으로 오디션을 대신했었다.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들만 쏙쏙 골라냈냐며 같이 수다를 떨 만큼 사람들이 좋았다. 준비하며 크고 작은 일은 당연히 있었으나 역시 함께하는 사람이 좋으면 그걸로 모두 괜찮아지는 마법은 늘 존재하는 건가 보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다들 위스키 몇 잔을 원샷하며 나름의 창단식과 2주간의 연습 기간을 기념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에 좋은 술이 빠질 수 없다는 건 매우 한국적인 생각인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 사는 건 어디든 비슷하다 싶어 웃음이 났다.

공연이 끝난 다음 날 올해의 바쁜 시즌은 끝났다 싶은 마음에 침대에서 늑장을 부리던 중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도 들었다. 바쁜 시기가 아니어서 헛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그랬는지 한동안 마음을 잡기가 참 힘들었다. 무슨 일인지 그날 이후로도 며칠을 연달아 가깝거나 먼 이들의 부고 소식이 계속 날아들었다. 사람의 큰 부재 앞에 사는 게 모두 허망하게 느껴져서 그 허무함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씩 현실감을 되찾고 큰 문제 없이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정신차려보면 멍하니 눈만 뜨고 있는 시간이 있었다. 사람들의 연락에 답을 하지 않고도 답을 했다 생각하고는 넘어가는 일도 허다했다. 그냥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지난달에는’ 이라는 말로 흘러간 시간을 정리하고 있을 수 있는 만큼 시간이 지나가긴 했다. 그렇지만 정신이 없었다는 짧은 말로 그 시간을 정리하고 덮어버리기엔 아직도 마음이 텅 비어 허무감이 든다. 눈물이 흔해 빠진 성격이긴 하지만 부쩍 눈물이 더 쉬워졌다. 뭐 이건 추운 겨울 탓이라고 돌려둬야지.

일상으로 잘 돌아온 건지 내가 지금 현실을 살고 있긴 한지 아직 잘 모르겠고, 이제 올해 당장 큰 연주일은 없지만. 그리고 사는 건 언제나 허무했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일도 다시 연습을 할 거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할 거고, 사람들과 계속 이야기를 할 거다. 모든 게 다 허무하다면서 왜 여전히 일상을 살며 연습을 하고 있는 건지, 왜 몇 주간 책을 읽지 못했음을 아쉬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사는 게 참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