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공연들로 잠시 좀 열심히 살았다. 지금은 연말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잠깐 쉬는 타이밍이다. 이달 말쯤 휴가 일정도 잡았다. 그동안 바빴던 일을 마무리하고 10월 계획을 세우며 마음이 넉넉하고 또 흐뭇했다. 마음에 똑 드는 휴가 계획도 잡혔고, 이제 휴가를 즐기기 전까지 조금 여유를 부리며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 리스트와 안타깝도록 더딘 진행으로 차마 들여다보지 못했던 개인 프로젝트를 조금씩 챙겨보겠노라 패기 넘치게 다이어리에 적었다. 그래서 요즘 뭘 하며 지내느냐 하면, 다이어리에 적어둔 계획처럼 개인 프로젝트를 하며 책이나 읽고 지내긴커녕, 혹시나 죄다 날아갈지도 모르는 내 데이터를 걱정하며 전전긍긍 지내고 있다.
아, 정말 인생.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10월을 시작하면서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컴퓨터 업데이트를 시도했다. 정말 그때 뭔가에 홀렸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원래 시스템 업데이트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속해있는 생태계는 오래된 기기를 업데이트하면 복불복으로 벽돌이 될지도 모르는 양아치 같은 구조를 고수하고 있다. 쓰는 프로그램만 아니면 진작 탈출했을 것이다(그랬을까). 이번 복불복 벽돌 게임에는 나의 오래된 컴퓨터가 당첨됐다. 쓰던 글과 쓰던 곡과 녹음 중이던 곡이 일단은 사르륵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동안의 수 없는 빡침과 명상으로 이제 해탈하여 마음이 단련된 나는 더 이상 화가 없는 사람이 된 걸까. 그러기엔 직전에 끝마친 일을 할때 너무 깨처럼 빡쳤었는데. 모르겠다. 까만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정말 신기하리만치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좀 씁쓸하고 입술이 좀 삐죽했다. ‘네가 무슨 계획을 세워요, 밥 먹는 시간도 안 지키면서’라고 인생에게 비웃음당한 기분 같은 그런.
새로 정리할 문서도 있고 혼자 녹음도 좀 하려 했는데 아직 벽돌 컴퓨터를 안고 여기저기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데이터 리커버리 센터에서는 언제나 연락을 줄는지, 늘 ‘기다림’을 할 때마다 이곳이 얼마나 여유 느긋한 나라인지 느끼게 된다. 좋다. 나도 이런 여유로움을 본받아야지. 고맙게도 친구에게 마침 스페어 컴퓨터가 있다고 해서 양해를 구하고 잠시 빌려서 글을 쓰고 있다. 한국인 친구가 전부터 쓰던 한국 컴퓨터여서 인지 한글 자판도 있고, 무려 한컴이 있다. 글을 쓰려고 한컴을 열었다가 뜬금없이 실컷 폰트 구경을 했다. 아, 한컴에는 이런 글자체가 있었지. HY 목각체, 그 유명한 휴먼굴림체(는 사실 없음), 어머 세상에 양재 샤넬체라니 너무 오랜만이야.
언제부터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문득 생각하니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누가 보면 직업이 프로그래머라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음악 산업이 그렇게 굴러가 버렸다. 나만큼 어쿠스틱 연주를 고집하는 사람도 드물 텐데, 집에 자꾸 까맣고 굵직한 선을 곁들인 ‘음악 장비’가 늘어간다. 늘어가는 장비의 꼭대기에 이제는 벽돌이 되어 데이터라도 잇고 업고가 되어버린 내 컴퓨터가 있다.
뭐,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리.
하, 정말 인생.
'여전히 오늘도 #3B8CCF'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럽다, 스걸파 (0) | 2022.01.10 |
---|---|
2021년 11월 (0) | 2021.12.06 |
야외 공연 feat. 코로나 시국 (0) | 2021.09.15 |
온라인 공연 feat. 코로나 시국 (0) | 2021.08.16 |
2021년 7월 라이브 공연 (0) | 2021.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