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발레를 오래 본, 연상의 지인이 한동안 무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함께 성장한 무용수들의 은퇴 소식이 전해졌던 때였다. 콩쿠르를 누비던 주니어 때, 신인 시절, 솔리스트, 주역 데뷔를 다 기억하는데 어느새 은퇴 공연을 올리고 무대에서 내려온다니 적응이 되지 않는다면서. 아직도 거침없는 젊은 시절이 생생한데 발레계에서 흐르는 시간은 일반적인 기준과 다르다고.
특히 국내 무대에 비슷한 시기를 거쳐온 주역급 무용수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한 세대가 저물었다는 기분에 잠시 서글퍼졌다고 밝혔다. 그분께서 언급한 무용수들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무대에 서고 계시지만, 큰 전막 무대를 기대하긴 어려운 사정이다.
언젠가 나도 저 시기를 거치겠거니 했다. 그래도 아직 내가 보고 자란 무용수들이 은퇴할 연령은 아니기에, 비슷한 때 몰릴 줄 알았다.
이미 일찌감치 무대를 떠난 코르드나 솔리스트급의 무용수들도 존재한다. 이런 경우엔 변변찮은 퇴단식도 없이 아티스트 목록에서 이름이 사라진다. 운이 좋으면 커튼콜 말미에 한두 번 다시 인사하는 마지막 공연을 볼 수도 있지만, 대개 미리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겨야 마땅한데 아직도 이별에는 익숙치 않다.
그래도 현 주역급들은 아직 시간이 더 남았다고 믿었다. 내 나이가 더 들었을 때쯤 그들도 은퇴할 준비를 할 줄 알았다. 분명히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눈에 밟히고 불안해지는 무용수가 있었다.
2022년 국립발레단 첫 정기공연을 2주쯤 앞둔 어느 날, 공식 SNS는 수석무용수 신승원의 퇴단 소식이 올라왔다.
두 가지 감정이었다. 지금? 얼마 안 남았는데? 하필이면 에메랄드로? 꾸준한 불안감을 느꼈으나 막상 소식을 접하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불길한 예감은 잘 맞아떨어질까.
예전 블로그를 뒤져보니까, 공연 관련 주제로 운영한 게 아닌데도 꾸준히 언급한 무용수가 신승원이었더라.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비중이 높았다. 특히 2014년 김리회-김기완-신승원 주역의 라 바야데르는 감자티를 맡은 신승원에 대한 후기가 대부분이었다. 지젤 중 패전트와 리드 윌리를 보면서도 언젠가 지젤로 보고 싶다고 적었고, 2017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오로라 데뷔 후기에도 지젤을 기다린다고 썼다.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오로라 공주였지만, 감정선과 표현력이 더 돋보이는 무용수라서 지젤이 훨씬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김희선, 허서명과 함께 한 백조의 호수 파드트루아는 최고의 조합으로 남다른 감동과 존재감을 남겼다. 그 파드트루아는 아직도 레전드 조합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난 신승원의 지젤을 못 봤다. 일부러 안 봤거나 시간적으로 엇갈린 게 아니다. 서울 공연 캐스팅에 없었다. 2020년에 드디어 캐스팅이 뜨긴 했으나 (내가 원하는 파트너가 아니었으며) 코로나 상황으로 취소됐다.
부동의 최애 여성 수석이었던 김지영의 퇴단 이후 이 캐스팅 저 캐스팅 골라잡으면서 표류하던 나에게 훅 들어온 공연은 작년의 라 바야데르였다. 원래는 올가-김기민 회차였다가 발레단 측의 안일한 일처리로 변경된 캐스팅이었으나, 굳이 바꾸지 않고 공연을 보기로 결정한 이유는 신승원의 클래식 전막 주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최고였다. 당초 캐스팅이 아쉽지 않을 만큼 만족도가 높은 공연이라서 막공을 1회 더 보게 만들었으니까. (link)
개인적으로 라 바야데르는 그다지 선호하는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주역 캐릭터에게 몰입이 어렵고, 감정선이 와닿지 않았다. 지금껏 직관으로 볼 때마다 결국 감자티 공주를 가장 좋아했기에 캐스팅이 다 나온 이후엔 감자티 캐스팅을 더 고려해서 골랐다. 3막엔 감자티가 나오지 않는 걸 가장 아쉬워했다. 그 캐릭터성이 취향이 아닌 줄 알았다. 신승원은 처음으로 니키아를 사랑하게 만든 무용수였다. 물론 솔로르와 감자티와의 조합도 좋았는데, 지금껏 본 무용수 중 가장 내 마음을 건드리는 니키아를 표현했다. 드라마틱한 연기력, 눈망울마다 사연이 가득 담긴 매혹적인 분위기. 도도하고 화려한 감자티로 기억했던 무용수라서 더 놀라웠다. 드라마 발레도 아닌데 계속 캐릭터 해석을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이입하게 만든 건 처음이었다.
갈라에서 보여준 사타넬라도, 호두까기 인형 막공도, 허서명과 페어를 이루니 눈이 즐거웠다. 둘 다 표정이 해사하고 반짝거리는 이미지가 있으며 몸이 가벼워서 그림체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줬다. 지금 보면 또 언제 보게 될 수 있을까, 항상 좀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어서 더 열심히 집중했다.
올해 라인업에 백조의 호수와 지젤이 있어서 무조건 신승원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고집쟁이 딸의 발랄하고 코믹한 리즈도 기대했건만. 작년 연말정산 글, 올해 2월 글에도 갈망 페어로 꾸준히 언급했는데. 하필이면 주얼스 1막 에메랄드로 퇴단이 결정됐다니?
원래 이번 주얼스를 꼭 보러 가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신승원-김기완 에메랄드는 조금 보고 싶었다. 작년 캐스팅을 참고해서 막공을 예매했었는데 캐스팅이 역시 내 예상대로 돌아갔고, 별로 새로운 느낌이 아니었다. 국립극장이라 예술의 전당보다 멀고, 현재 오미크론 상황도 심각해졌는데 전부 극복하고 갈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재연 텀이 너무 짧아서 완성도를 높이기 어려울 듯했다. 그럼에도 신승원을 보겠다고 큰 맘 먹고 나갔다.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혜민, 김지영이 몇 년 전에 무대를 떠났다. 그 둘이 양대 발레단 부동의 최애였는데도 지금처럼 마음이 허하진 않았다. 아직 더 보고 싶은데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못 보내겠단 맘은 없었다. 충분히 사랑받았고, 많은 무대로 만났고, 항상 인정받았던 무용수였으니까.
신승원은 다르다. 아직 더 보고 싶은 무대가 많았고, 올해쯤에는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아직 지젤도 백조의 호수도 못 봤는데. 어쩐지 충분히 못 보고 보내는 느낌이라서 더 안타까운 감정이 남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관객들에게도 아픈 손가락 같은 무용수였다.
신승원-김기완 페어는 지젤로 보고 싶은 페어였다. 몇 년 전에 본인들이 지젤로 만난 날을 기대한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해서 더 기대가 컸다. 그런데 에메랄드로 보게 되다니. 그래도 그 에메랄드는 27일 공연 중 가장 아름다웠다. 촉촉한 감성이 듬뿍 담긴 움직임이었다. 신승원을 가볍게 내려놓는 김기완의 서포트는 언제나처럼 진지했다. 신승원은 모든 동작에 정성을 담아서 아련하고 화사한 모습을 보여줬다. 단연코, 수석다운 아우라로 무대를 수 놓았으며 표정이 찬란했다. 숲속의 뮤즈처럼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한순간의 꿈처럼 퇴장하고 남은 무용수들이 애틋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안무를 보는 순간, 떠나보내는 게 실감이 났다.
2막 루비와 3막 다이아몬드까지는 두 번의 인터미션이 진행된다. 의자에 붙은 야광봉을 만지작거리면서 한참 착잡했다. 진짜로 퇴단식을 진행한다고? 이 길다면 긴 시간을 기다리는 무용수 심정은 어떨까. 꼭 지젤이 아니더라도 전막 주역 퇴단이 더 모양새가 좋지 않았을까.
이후 세대를 장식할 차기 수석무용수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직도 저렇게 남다른 빛을 내뿜는 신승원을 보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다음 세대에 주역감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훌륭한 테크닉을 지닌 무용수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을 꾸준하게 주역으로 키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무용수의 실력에 기대서 겹치기 캐스팅을 감행하며 당장의 위기만을 모면해왔다.
단원들의 인사 영상이 스크린에 떴다. 가장 오래오래 많이 춤출 것 같았는데 빨리 갑자기 발레단을 나가게 돼서 아쉽고 속상하다는 수석무용수 박예은의 말이 콕 박혔다. 영상을 본 신승원은 내 예상보다 더 많이 울었다. 영재원 시절부터 함께 한 김리회가 옆으로 와서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다가 같이 울었는데,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게 떠올랐다. 축하해줘야 되는데, 잘 된 일인데, 마음이 좀 그래요. 관객이었던 내 마음도 딱 그런 느낌인데 함께 오랜 시절 지내온 동료들이 더 허전하겠지.
꽃을 한 송이씩 받으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는데, 청소년기부터 봤던 무용수가 내 예상보다 일찍 퇴단하는 건 심란한 일이구나 싶었다. 아직 몇 년은 더 무대에서 볼 줄 알았는데.
반추해보니 신승원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매혹적인 분위기가 완성됐던 무용수였다. 어느 역할이든지 무대에 진심으로 몰입하던 모습은 쉽게 잊을 수 없으리라. 진짜로 숨이 넘어가듯 흐느끼면서 추던 춤도. 어떤 공연을 봐도 신승원의 빈자리를 체감할 것 같다. 이제 신승원은 동덕여대 교수로 가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능력을 한껏 인정받으며 꽃길만 걷길. 그리고 이렇게 현실 부정하면서 몇 주 내내 궁상을 떨었던 게 무색해질 만큼, 무대에서 다시 만날 일이 생기길 기대해본다. 아직 무대를 누빌 나이니까.
동시대를 살아왔던, 앞으로의 무대에 당분간은 당연히 존재할 줄 알았던 무용수의 퇴단식을 보고도 여전히 마음에서 못 보내다가 미련 가득 안고 기록을 남겨둔다.
매우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춤의 잔상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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