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얕은 첫눈이 쌓여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가 싶더니 기온이 다시 영상 20도 언저리를 맴돈다. 낙엽이 지나가고 앙상해진 가지 사이를 걸으면서 느끼는 따뜻한 날씨가 좋으면서도 이상하고 또 걱정스럽다. 얇은 티셔츠에 가디건만 걸치고 나왔는데, 가디건이 성가시도록 더웠다. 올여름 한국이 장마로 시름 하는 동안 이곳은 유례없던 폭염에 시달렸다. 거창해서 좀 웃기지만 나는 지구 혹은 인류의 존속 여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다. 모두를 위해 당장 무언가를 멈추고 행동해야겠지만 그러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모두를 위한다지만 그 모두가 어디에서 누구까지 포함하는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미 늦어버린 건 아닐까 절망스러운 마음도 간혹 든다. 하지만, 가끔 지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아주 작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산책하는 시간이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나 보다. 집 근처 걸을만한 장소가 많은 건 큰 행운이다. 여름 내내 푸르다가 이제 제 할 일을 마친 마른 가지들을 올려다보고 깊지 않은 골짜기 사이 작은 개울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자연 속을 걸을 때 마다 묘하게 벅차올라서 일부러 짬을 내어 조깅이나 산책을 해왔다. 요즘은 느긋하게 주말 산책을 즐긴다. 여러 자아 중 공연하는 자아를 자주 꺼내기가 힘들어져서 오히려 생긴 여유인 거 같기도 하다. 예술 문화계 전반이 망가졌다. 풍파에도 꼬장꼬장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오던 주변 예술인이 모두 힘겨워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재능기부와 박봉의 가시밭 속에서 이제야 조금씩 예술인들이 자신의 가치를 요구하는 시대가 왔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시간이 와버렸다. 그래도 내가 할 일을 계속해나가야 겠지.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운 시기가 있다. 어려워서 그만둬버리면 그건 그대로 포기가 돼버리지만, 꿈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면 어렵고 넘어졌던 순간들이 모두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나온 에피소드가 되더라고 몇 해 전 어느 작은 강연 자리에서 주제넘게 더듬더듬 주절거렸다. 존버하기. 그래서 멈춤을 실패로 놔두지 말고 다 지나온 에피소드로 만들기. 뭐라도 된 듯 사람들 앞에서 지껄였지만, 사실은 간절히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이기도 하다. 그저 버티기만 하는 거도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니까. 어떻게든 버텨 내기.
하지만 아무리 굳건히 견뎌왔다 하더라도 너무 오래 버티다 보면 무엇을 버텨내고 있었는지 문득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까 봐 사실 겁난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는 버틸 수도 없는 그런 때가 오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 때가 올까 봐,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게 가장 겁이 난다. 오지 않겠지만, 생각하면 가장 아찔하다.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으니 지금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기고 사랑해야 한다.
좀 더 걷고 싶은 산책로가 있었는데 내일을 위해 남겨뒀다.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부지런히 나눠 먹을 음식도 만들었다. 이맘쯤의 주말 저녁 시간은 보통 공연이었는데. 이 시기가 끝이 나긴 할까 덜컥 두렵다가 다시 마음을 잡는다. 이 순간을 온 마음을 다해 즐기기. 타인을 위한 음식을 정성껏 만들었고, 내일 다시 걸어볼 산책로가 남았고, 책을 좀 읽었고, 글을 조금 썼다. 허세나 부리며 버텨온 하루처럼 느껴지다가, 신묘하게도 이런 하루가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 정도면 뭐, 됐다. 내일은 약간만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야지.
'여전히 오늘도 #3B8CCF'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 한 해 고생 많으셨어요 (0) | 2020.12.22 |
---|---|
내가 귀여워서 그래 (0) | 2020.11.30 |
전시회장을 다녀와서 (0) | 2020.10.20 |
첫 휴가 (0) | 2020.09.26 |
직업 예술인 (0) | 2020.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