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정신을 위해 어느 정도 자아를 분리해 두고 사는 편이다. 아이돌처럼 주로 나이가 어린 연예인에게 기획사에서 그들의 인성 교육을 할 일이 아니라 일을 하는 동안 빼서 쓸 수 있는 ‘일하는 자아’를 분리하는 걸 알려주면 좋겠다(물론 기본 인성이 쓰레기가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제 일을 책임감 있고 전문성 있게 끝마친 후 퇴근하고 나면 더는 억지로 웃지 않고 굳이 무리하여 친절할 필요도 없도록. 그래야 본인이 하고 싶은 일도 오래 건강히 할 수 있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바닥에서 본인의 인생 설계도 잘 할 수 있는 거 같다. 가면을 쓰고 사는 게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퇴근 이후에도 사생활로 굳이 비집고 끼어드는 무례한 미디어나 팬 등에게 ‘업무 끝났으니 내 사생활에서 꺼지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절 노동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꺼지라고 말하는 서비스 업자는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퇴근이 필요하다는 스스로의 요구에서 나의 자아 분리 시도가 시작됐다. ‘퇴근 후 카톡금지법’은 아직도 몇 년째 국회에서 계류 중이고 프리랜서들은 사실상 물리적으로 퇴근할 시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 작업에서 있어서는 나 혼자 대주주이고 상사이고 후임이고, 북도 치고 장구도 쳐야 하니 정신이 업무로부터 로그아웃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퇴근이 없으니 멘탈이 조금씩 바스락 대는거 같았다. 그러니까, 뭔가 거창하게 일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일과를 마친 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도 ‘연습을 한 번 더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라던가 혹은 ‘작업하던걸 좀 더 봐야 할 거 같아’ 하는 조바심 같은 게 계속 드는 거다. 가끔 시간 개념도 없이 당혹스러운 시간에 업무 관련 연락을 해오는 이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퇴근을 해버려서, 아유, 일을 더 하고 싶은데 이미 퇴근을 해버렸네? 같은 차단벽이 필요했다. 하는 거 없이 바쁘게 감정만 소비하는 머릿속을 꺼줄 스위치가 없을까 고민하던 게으름쟁이는 결국 자아 분리를 시도했고, 결과는 뭐 크게 나쁘지는 않은 거 같다. 생각보다 의외의 장점도 있고.
예를 들어 간혹 연주를 망쳐서 ‘연주하는 자아’가 그날 망했다 하더라도 ‘나’의 인생은 끝나지도 망하지도 않았으므로 멘탈 보호에 효과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그저 회피 공간을 만든 듯 보이지만 모든 일이 원래 어떤 날은 잘 될 수도 어떤 날은 망칠 수도 있는 거니까. 그 약간 더 잘한 것에 일희 하고 약간(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망친 것에 일비 하며 살면 정말이지 정신줄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또는, 일할 때 적당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혼자 정해둔 ‘모두에게 친절 합시다’ 같은 약속을 큰 스트레스 없이 비교적 잘 지킬 수도 있다. 모두에게 친절할 만큼 좋은 사람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약속을 했으니 일 할 때 만큼은 가면을 골라 쓰듯 친절한 자아만 빼서 쓰려고 노력하는 거다. 적당히 좋은 사람이고 싶지만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 아닐 때, 하지만 그 사람이랑 꼭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쳤을 때도 ‘일하는 자아’ 외에 다른 ‘나’는 소개해 주지 않는다. 정말 이렇게 말하니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듯이 보여 좀 웃기지만, 적어도 이런 사람과 계속 마주하며 밥을 먹고 살아야 할까 같은 자괴감에 그리 과하게 빠지지 않을 수는 있다.
누구나 여러 버전의 자아가 있다. 본연의 나와 일할 때의 나, 가족들이 알고 있는 나와 집 밖에서의 나 등이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이다. ‘나’와 ‘무언가를 하는 자아’를 잘 분리 해두고 살며 조금이라도 덜 스트레스 받으면서 건강한 정신으로 일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이 자아도 저 자아도 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당혹스럽게 빡칠 때는 모든 것의 마지막 보루, 귀여운 자아를 꺼내 든다.
다 내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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