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뭘 하고 싶은 걸까.
가을이 들어앉은 언덕을 바라보며 한참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라는 말이 썩 어울리지 않았지만, 끝없이 드는 생각은 아무튼 ‘뭘 하고 싶은 걸까’ 였다. 그 자리에 앉아 무료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려고 세시간을 운전해서 갔다. 열없고 즐거웠다. 혹시 그럴 수만 있다면 꼭 그러고 싶었던, 내가 바라던 휴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세상에 코로나 라는 게 없던 작년 휴가 이야기다. 나의 첫 휴가이기도 했다.

사실은 조금 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멘붕은 어느 순간 갑자기 파박! 하고 온 게 아니라 서서히 옅게, 누수로 물이 새어 스며들듯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쌓였다. 우울의 시간이 모이고 쌓여 세상을 온통 회색으로만 칠해두고 존재를 알아 달라는 듯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꾸역꾸역 움직였다. 특별히 쉬는 기간을 따로 가져야 할 만큼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휴가’ 같은 말도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느껴졌다. 하루 8시간 매일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을 하고부터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늘 초조하고 불안했고 그래서 무언가를 하며 끝없이 움직이거나 혹은 초조함에 그대로 잠식 당한 채 그냥 시간을 메워왔다.
어떤 이는 쉽게 내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시대를 아우르고 이름을 널리 떨칠 만큼 대단한 대작을 남긴 거도 아니고, 듣자마자 크게 감명받고 마음을 울릴 만큼 그만큼 엄청난 실력도 아니고. 어떤 이는 음악인이나 예술인이라는 직업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 그런 건 그냥 취미로 즐기는 활동 중 하나 아닌가요, 그게 직업이랄 수 있나. 그런 말에 흔들릴 정도는 아니어서 큰 다행이었다.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잠깐의 쉼표 없이 끝없이 나를 끌어 올려 내다 쓰기만 한 결과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내놓아야만 해서 아무렇게나 내던져놓은 너더래 한 무언가들만 가득했다.
다급하고 절실하게 휴가를 내걸었다. 휴가계를 낼 곳도 없고 결재받을 곳도 없지만 그래도 내 상태를 알리고 싶어서 SNS마다 휴가라고 광광댔다. 지난번에 ‘연주자’라고 스스로 내 직업을 드디어 명명했을 때처럼 희한하게 기분이 말끔해졌다. 우연히도 휴가 직전 스케줄은 이 도시에 처음 와서 ‘나도 꼭 저기서 연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에서의 연주였다. 나름의 작은 성취가 있어서 더 가뿐한 마음으로 나에게 휴가계를 올렸다. 연주를 끝내자 드디어 휴가가 시작됐다. 맛있는 것을 먹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그리고 메일 확인을 하지 않았다. 휴가 동안 단 한 번도 메일 확인을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대단한 건 없었다. 같은 도시에 머무르고 있는 오랜 친구와 문득 피클을 먹자고 만나서 길게 낮술을 즐겼다. 어차피 휴가 기간이니 급히 자리를 정리해야 할 일도 없었다. 아무 말 없이도 서로 편안한 사람과 모든 말을 다 나눴다.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이 콧노래가 나왔다. 다음날은 단풍 드는 언덕이 보이는 곳에 가서 숙소 체크인을 했다. 동행인은 다음 날 저녁 식사 외에 어떤 스케줄도 없으니 마음껏 늘어져 쉬라고 했다. 뒹굴며 읽을 책이 한 꾸러미 였다. 밤 동안 맥주와 영화와 책 사이에서 빈둥거리다가 다음날은 가을하늘과 칵테일 사이에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은 뭘 먹었더라. 해가 질 때까지 한참 풍경을 눈에 담고 있던 것만 기억난다. 그냥 이러고 싶었던 거구나. 이 잠깐을 나는 나에게 내주지 않았었구나.
여전히 나는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은지 고민하지만 한정 없이 나를 끌어다만 쓰는 우둔한 일은 이제 하지 않는다. 누구나 일을 하며 스트레스받지 않기란 불가능하지만, 그 스트레스에서 잠시 빠져나와 마음을 내려두고 고요히 쉬는 일은 내가 열의를 가지고 어떤 일을 잘 해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나는 뭐든 해도 되고 뭐든 하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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