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화창한 날이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져서 기분 좋게 연습 시간을 보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유 부릴 시간이 비교적 많아졌다. 다른 이들은 이런 시기를 틈타 거창한 일을 턱턱 잘 해내는 거 같다. 깊게 부러운 마음이 들지만 크고 거창한 일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이 기회에 작은 일을 꾸준히 하는 습관을 길러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던가, 아주 짧은 일기를 적어본다던가. 그중에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은 매일 연습하기이다. (뭐? 연주자라면서 연습을 ‘매일’ 안 했다고?? 같은 생각이 드는 분에게는, 음. 죄송합니다…)
덧붙이는 변명이지만, 생각보다 ‘매일’ 이란 건 정말 무섭고 또 어려운 일이란 걸 인제야 조금씩 느끼는 중이다. 매일 꾸준히 뭔가를 반복 한다는 거 자체가 일단 쉽지 않은 일이고 거기에 더해 생활 패턴도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게다가 매일 하기로 한 일 앞에 얌전히 나를 앉혀다 놓으려면 정신줄도 잘 붙잡고 있어야 하고, 내가 하려는 일에 필요한 시공간도 모두 적절하게 유지하여야만 한다. 그러려면 결국 나와 내 공간을 잘 돌보는 수고로움은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요소라는 걸 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 공간을 스스로 돌보지 않고도 계획한 일을 매일 할 수 있는 건 누군가 나 대신 그 공간을 필사적으로 유지해 주고 있어서 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처음 하려 했던 매일 습관은 ‘연습’ 하나뿐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른 부수적인 일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떼어낼 수도 없게 찰싹 달라붙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일과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등교만 하면 됐던 학교나 연구실이 문득 그리워지다가, 다시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린다. 그땐 그때대로 다른 일과가 또 오밀조밀했고 그 당시 것의 스트레스에 질색팔색을 하며 늘 탈출 궁리를 하던 건 나 자신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하며 즐겁게 지내야 한다.
매일 같은 길을 산책하다 보면 아주 작은 변화가 크게 다가와서 그 풍경이 새롭게 보이는 재미가 있다. 오늘은 요만큼 새순이 돋았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황량하더니 금방 푸른색이 되었네, 같은. 매일 둘러보아야만 알아챌 수 있는 새로움처럼, 매일매일 같은 곡을 계속해서 연습해보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재미가 느껴진다. 이게 이 곡의 묘미였구나. 옛날 선생님이 알려주시던 그 소리를 아주 약간 알 것도 같아서 가슴이 막 웅장해지다가 다시 알듯 말듯 연기처럼 휙 사라진다. 스쳐 지나가듯 겨우 오려 하던 그 느낌을 단단히 붙잡아 두지 못해서 그렇게 속상하고 안타까워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평생을 바쳐 성음 그 하나를 얻는 거라고 하셨다. 겨우 알 것도 같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경솔하게 느껴져서 멋쩍게 비웃고 공간을 정리한다. 내일 이 공간으로 다시 나를 붙잡아 오려면 오늘의 내가 깨끗하게 잘 배려해 둬야 한다.
이렇게 매일매일 오랜 시간 동안 공을 잘 들일 수 있도록, 부수적인 일과들을 요리조리 조율하면서 개인 생활을 적절히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나도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손끝에 혼을 떨어뜨려’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딱 한 번이라도 그런 순간이 올 수 있다면.
'여전히 오늘도 #3B8CCF'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단한 사람들 (0) | 2021.05.17 |
---|---|
연緣이 닿으면 (0) | 2021.04.22 |
2021년 1월 (0) | 2021.01.31 |
올 한 해 고생 많으셨어요 (0) | 2020.12.22 |
내가 귀여워서 그래 (0) | 2020.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