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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오늘도 #3B8CCF

연緣이 닿으면

 

 

노랗게 개나리꽃이 만개하고 나무마다 초록초록 새순이 맺혔다. 남쪽에서 출발한 봄이 이제야 여기에도 도착하려나 보다. 날씨가 누그러지니 며칠 동안 주변 이웃이 모두 집 앞 화단을 정리하느라 내내 분주했다. 초록이 맺히고 햇살이 쨍해서 사람들이 움직이니 괜히 나까지 마음이 설레서 올해 꽃을 더 심어볼까 싶어졌다. 작년에 우연히 심었던 미니장미가 늦게 심었다, 장미는 비료를 많이 줘야 한다 하는 주변의 관심 없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꽃을 피워 내준 덕에 더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핑크 미니장미 옆에 희고 푸른 수국을 심고 싶어 희망차게 꽃 농장으로 향했다가,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하고 잔뜩 시무룩해져서 돌아왔다. 장미 옆이 어쩐지 더 허전해 보여서 풀 죽어 했더니 동거인이 아직 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라고 위로했다. 하긴 맞는 말이다. 뭐든 인연이 닿아야 그제야 만나서 내 생의 어딘가로 모셔올 수 있다.

사람의 몸이 악기라 할 수 있는 가수를 제외하고, 모든 기악 연주자들은 악기와도 연이 맞아야 한다는 말에 대부분 공감할 거다. 악기에도 인연이란 게 있어서 꼭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의 첫 만남을 다 기억하듯이 악기와의 첫 만남도 생생히 기억난다. 무난히 악기사에서 처음 만난 악기도 있고, 선생님의 연습실에서 문득 만났던 새 악기가 이상하게 내 악기처럼 다가와서 곡절 끝에 내 것이 된 악기도 있다. 어딘가 떠돌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실어주던 악기가 구불구불 이어진 人生처럼 돌고 돌다가 마침내 나와 만나 제자리를 찾은 악기도 있다. 악기도 그냥 물건일 뿐이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 텐데, 내 악기 악기 마다 사연이 묻어 있어서 어린아이의 애착 물건처럼 예민하고 집요하게 더 챙기게 된다.

지금도 함께 있는 악기들은 고맙게도 나와 인연이 깊은지 내 10대와 20대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내가 크게 울었을 때도 곁에 있었고 크게 기뻐한 순간에도 당연히 곁에 존재했다. 잘 관리해서 멋지고 좋은 소리를 내야 할 때 본인 몫을 다 하고는 큰 공연이 끝난 후에는 (결국 긴장이 풀려 내 컨디션이 달라져서 일테지만) 신기하게도 악기도 소리가 달라진다.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을 그렇게 다 같이 지나 이 타국까지 와서도 함께 하고 있다니. 여기서 이만큼 자리 잡은 거도 악기와의 좋은 인연 덕을 아예 보지 않았다고 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다. 내 악기도 나만큼 역마살이 살짝 있나 보다. 

잘 모르겠고 그냥. 

아무 계획도 없이 어떻게 악기를 꼭 챙겨 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고 그냥 이라고 솔직히 대답했는데, 이제는 나와 그만큼 인연이 깊어서 얘들도 여기까지 따라와 줬다고, 그래서 정말 고맙다고, 그렇게 대답해야 할거 같다. 여전히 계획 없이 왜 악기를 데려왔냐는 질문은 아직도 속 시원한 대답을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도 같이 궁금해한다.

4월 중순이 넘어가고 있는데, 오늘 아마 이번 겨울 마지막일 듯한 눈이 내렸다. 아마도 나랑 연이 있을 꽃모종은 벌써 농장에서 나와서 굳이 춥게 눈을 맞고 싶지 않은가 보다. 곧 연이 닿을 꽃모종이 똑똑이라니. 벌써 어딘가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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