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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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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학문의 경계에서 -나중에 교수하는 게 어때요? 전공 교수는 부담스럽다고 할 거죠? 다 알아요. 내 말은, 교양 과목 강사요. 서양음악의 이해나 음악가의 연애담 강의하면 귀에 쏙쏙 들어올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말할 땐 재미없는데 님이 하면 재미있어요. 소설 창작을 매개체로 만난 지인이 갓 대학에 입학한 나에게 한 말이다. 그의 어머니는 첼로를 전공한 음악 선생님이신데 가끔 내 음악 유머를 전해 듣고 깔깔 웃으셨다고 한다. 마침 난 뜬구름을 잡는 중이었다. 자기소개서 앞에서 순간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취미와 특기 칸을 채우고 보니까 몇 배로 넓은 칸이 나왔다. 희망 진로. 나는 연주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무난한 건 레슨 선생님이지만, 아이들을 잘 다룰 자신이 없었다. 음악치료사 어떨까? 그 커리큘럼을 ..
언제까지 핑크를 멀리할 작정인가! 사회적 인식은 색채 이미지를 규정한다. 여자는 핑크, 남자는 파랑으로 표현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놀라운 일이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오히려 그 반대 의견이 더 우세했다. 1918년에 한 잡지에서는 남아에게 핑크를 입히는 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라고 밝혔다. 핑크는 확고하고 강건하며 파랑은 섬세하고 앙증맞은 색이라는 이유였다. 1893년 뉴욕 타임스도 남아에게는 핑크, 여아에게는 파랑을 입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빨강은 피의 색, 예수 그리스도의 색, 강하고 힘이 넘치며 다소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색이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정3품 이상만 연한 붉은색을 입었다. 서양에서는 남성의 군복이 용감한 빨강이었다. 역시 남성에게만 허락된 추기경이 입은 옷 역시 위엄이 넘치는 빨강이다. 짙은 빨강이 ..
이상과 현실 : 미술 경험 단상 난 종이가 보이면 그림을 그리는 아이였다. 그 사실을 아는 친척들은 생일이나 어린이날이면 미술 도구를 선물로 주곤 했다. 그중에서도 채색 도구를 선호했다. 크레파스는 가능한 많은 색상이 들어갈수록 설렜다. 몽롱한 색채의 파스텔도 매력적이었다. 물을 뿌리면 수채화처럼 변하는 색연필, 돌돌 풀어서 쓰는 색연필, 연필처럼 생겼지만 좀 더 부드러운 색연필은 저마다 질감이 달랐다. 물감으로 영어 색상 명칭을 배웠다.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주제가 정해진 그림을 그렸다. 첫 주제는 봄이었다. 자신만만하게 그릴 수 있었다. 자연물 묘사는 내 특기 중 하나였다. 노란 나비가 남실거리면서 고운 색채의 꽃에 살포시 앉고, 자그마한 연둣빛 새순들이 보드라운 흙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민다. 연한 색들로 뭉글뭉글 피어..
고전 음악의 규칙적 리듬, 낭만 음악의 템포 루바토 많은 음악학자는 을 음악의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원리로 본다. 리듬은 그리스어의 flow가 어원이고, 소리의 흐름과 움직임을 뜻한다. 박, 악센트, 길이, 규칙성, 반복이나 변화는 다 리듬이다. 음악=소리로 인식하기 때문에 귀에 닿는 '선율'을 더 먼저 듣기 쉽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셈여림도 흐름도 다 리듬의 일종이다. 이 리듬이 반복되거나 변형되고 연결되면서 음악이 구성된다. 심장 박동, 손뼉 치는 행위, 걸음걸이, 고개 흔들기, 말하기처럼 인간의 신체부터 자전과 공전, 동식물 소리까지! 자연 속의 연속되는 움직임엔 비트가 들어가서, 음악가에게 영감을 준다. 음악의 기원 중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서 고된 작업을 최소화했다는 학설이 있다. 우리말로 쓰자면 영차 영차! 요새로 치면 일종의 노동요! ..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배신! 10살, 피아노를 배운 지 햇수로 3년쯤. 선생님은 모차르트 소나타 한 곡을 펼쳐놓았다. 이 곡 외우자. 무대에서 칠 거야. 멋지지? 즐겁게 친 곡이라서 암보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학원에서 제일 빨리 외웠을 정도니까. 난 아늑한 연주회를 떠올렸다. 연주회 기대된다, 그치? 내 말을 들은 한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우리가 하는 건 콩쿠르라고 고쳐줬다.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여태껏 몰랐느냐고 했다. -별로 달라질 건 없어. 연주회처럼 즐기고 내려와. 모차르트라는 위대한 천재 작곡가 작품을 완성하는 게 얼마나 보람찬 일이니? 상 못 타도 괜찮아. 근데 선생님이 보기엔 큰 상 타고도 남아. 선생님의 예언이 먹혔던 건지, 연주회로 시뮬레이션을 한 덕분인지, 얼떨결에 나간 첫 콩쿠르에서 무려 최우수상을 탔다...
공주는 언제 자? -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차이콥스키 3대 발레 중 하나인 통칭 는 화려한 러시아 발레 테크닉의 정석을 보여주지만, 다른 작품인 나 에 비해 덜 언급되고 상대적으로 덜 공연되는 작품이다. 음악 역시 두 작품만큼 유명하지 않다. 모음곡으로도 잘 연주되지 않아서 나 외에는 크게 귀에 익은 게 없다. 주변에서 전막을 좋아하는 발레 레퍼토리 TOP3나 TOP5에 꼽는 사람은 드문 편이고, 첫 관람에 홀딱 반한 사람도 흔치 않았다. 나는 첫 관람부터 푹 빠져들었고 좋아하는 작품 순위에 항상 들어가는 사람인지라 처음엔 다소 놀랐다. 그러나 곧 납득했다. 무작정 보기엔 첫 눈에 사랑하기 힘든 요소가 많다. 나는 왜 잠미녀를 처음부터 좋아했을까? 그 답은 꽤 쉽게 나왔다. 우리 집엔 잠미녀 거의 전막 음악이 수록된 음반이 있었다. 유아기부터 듣..
클래식 발레에 입문하고 싶은 당신에게 꽤 오랫동안 발레 애호가로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종종 질문을 받는다. 클래식 발레 공연을 실제로 보고 싶어졌는데 입문은 어떤 작품으로 하는 게 좋을까요? 역시 유명한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아니면 지젤 같은 로맨스가 좋나요? 동화 내용이면 다 큰 어른들이 보기에 유치하지 않을까요? 클래식 발레는 좀 지루하고 틀에 박혔다는 편견이 있는데요. 아, 그래서 뭐가 재미있어요? 예전엔 작품을 딱 집어서 추천해줬다. 요즘도 나름대로 아는 지인이면 좋아할 만한 작품을 골라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발레를 알면 알수록 이 질문의 답변은 하나밖에 없다. -사람마다 달라요. 뭐야, 그러면 다 다르다는 뻔하고 무성의한 이야기를 하려고 굳이 글까지 쓰는 거야? 추천할 자신이 없다는 소리인가? 뒤로 가기를 찾는 당신, ..
주인공 친구도 인생의 주인공 만화나 소설을 볼 때마다 난 주인공 친구에게 끌리곤 했다. 서사가 촘촘하고 확실한 주인공보단 조금 더 상상의 여지가 있는 주인공 친구. 특성상 좀 더 전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인공과 달리 더 자유로운 성격으로 묘사되는 점이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성장 서사에서 주인공 친구의 근황이 나오면 반가웠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느새 옛 친구는 잊고 새로운 친구와 더 가까워진 모습을 보면 서운했다. 주인공 친구도 또 다른 절친이 생겼겠지? 한 발레리나의 팬카페에 가입할 때 일이다. 카페 가입 질문을 성실하게 입력해야 가입이 승인되는 조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님을 좋아하는 이유, ○님의 작품 중 가장 감명깊은 역할 등. 그중에 흥미로운 게 보였다. 만일 내가 발레 무용수가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은? 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