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나 소설을 볼 때마다 난 주인공 친구에게 끌리곤 했다. 서사가 촘촘하고 확실한 주인공보단 조금 더 상상의 여지가 있는 주인공 친구. 특성상 좀 더 전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인공과 달리 더 자유로운 성격으로 묘사되는 점이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성장 서사에서 주인공 친구의 근황이 나오면 반가웠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느새 옛 친구는 잊고 새로운 친구와 더 가까워진 모습을 보면 서운했다. 주인공 친구도 또 다른 절친이 생겼겠지?
한 발레리나의 팬카페에 가입할 때 일이다. 카페 가입 질문을 성실하게 입력해야 가입이 승인되는 조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님을 좋아하는 이유, ○님의 작품 중 가장 감명깊은 역할 등. 그중에 흥미로운 게 보였다. 만일 내가 발레 무용수가 된다면 맡고 싶은 역할은? 특성상 전공생들이 많이 가입해서 만들어진 질문인 듯했다. 내가 무대에 설 일은 없겠지만, 한껏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빵가루 요정, 파랑새. 파키타 중 보석 등.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각종 요정, 결혼식장 초대 손님, 주인공 친구를 잔뜩 늘어놨던 기억이 난다. 지금 물어봐도 비슷하다. 회원수가 꽤 모인 뒤 올라온 통계 자료엔 그 발레리나를 롤모델로 삼는 사람들이 원할 만한 작품이 가장 많았고, 내가 쓴 작품들은 기타에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너무 많아서 'etc'로 묶였다! 하긴, 전공자 입장이면 드림 롤이 <백조>나 <지젤>쯤 됐겠지 생각하며 하나의 에피소드로 넘겼다.
발레를 보면서 음악에 집중한 덕분일까, 난 낭만주의 음악에 흠뻑 빠져서 얼떨결에 음악 전공자가 됐다. 진짜 뜬금없는 과정이었는데, 그 덕분에 과제 제출은 정말 편해졌다. 본인 전공 외의 연주회 감상문 쓰기. 발레 보고 차이콥스키 음악 연주 중심으로 쓰면 안 되나요? 콜. 음악회 프로그램 팸플릿 제작하기? Shall we dance! 전부 춤곡으로 채운다! 음악가 한 사람 정해서 조사해오고 발표하기.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CD와 불새 DVD를 가져가자! 의외로 클래식 전공자 중엔 발레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특이한 학생이 됐다. 좀 흥미진진한 연구 대상 비주류 감성. 그렇다! 내 취향은 비주류였던 것!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난 주로 발레로 치면 주인공 친구나 요정 중 1명 포지션에 가까운 곡을 연주하길 원했다. 전공하면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특성은 어디로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1학년 1학기에 당연히 모차르트 소나타를 고를 때 하이든 소나타를 밀고 나가고, 1학년 2학기에 베토벤 소나타를 고를 때 비창, 월광, 열정, 고별, 템페스트, 발트슈타인 등 표제가 붙어서 더 유명한 곡은 줄기차게 피했다. 고전 변주곡이나 쇼팽 외 낭만 에튀드가 실기곡이라 범주가 넓어졌을 때 신이 났다. 위클리(weekly. 매주 돌아가면서 연주하는 수업)도 최대한 덜 연주되는 곡 위주로 골랐다. 물론 가끔 흔한 곡도 레퍼토리에 들어갔지만, 100% 내 의사는 아니었다.
이유가 뭐였을까. 그리 뛰어나지 않은데 남들하고 겹치기까지 하면 비교만 당하고 좋은 반응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전공실기 만년 B+ 인생이었다. 졸업연주 때 A가 나온들 어디 써먹나!) 물론 그 이유도 어느 정도 맞다. 덜 하는 레퍼토리로 좀 더 부각되고 튀고 싶은 마음.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흔히 떠올리는 특정 작곡가의 이미지, 심지어 전공자조차 탈피하기 어려운 그 전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베토벤은 항상 웅장하고 묵직하고 단조 계열이며, 리스트는 쏟아지는 테크닉의 향연이고, 라흐마니노프는 비장하고 강렬한, 흔히 오해하기 쉬운 느낌들. 더 인정받는 명곡 사이에서 소외당하는 곡을 끌어내는 게 즐거웠다.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작곡가의 곡은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 들어주지 않으면 곡이 너무 슬프지 않을까?
발레 작품도 그 맥락이지 않았나 싶다. 전막을 두 번 이상 보고 이름과 얼굴을 익힌 단원이 생기면 그 이전엔 덜 보이던 장면이 눈에 띈다. 주인공 옆을 지키는 생기발랄한 절친, 꿈에 등장한 신비로운 정령, 리더급인 요정보다 더 개성 충만한 요정, 이름조차 없는 왕자의 친구 중 하나, 주인공을 위협하는 동물, 축제에서 유난히 신난 마을 사람, 웃음을 자아내는 결혼식 하객. 잘 모르는 관객들은 그저 주인공만 기다리며 시간 때우기 정도로 사소하게 여기지만, 본인 인생에서는 주인공 아닌가. 그들은 2인자가 아니다. 관객의 눈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성격을 부여하고 표현을 연구한다. 동작만 나열하며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사람과 자신만의 예술 세계에서 색채를 덧입히고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시선을 이끄는 사람은 확연히 다르다.
연주회에서 내 순서는 항상 중간쯤이었다. 피날레 연주는 물론이고 오프닝 연주도 맡은 적이 없다. 주인공 친구쯤 되는 위치다. 임팩트 넘치고 강렬한 곡을 선택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아예 오디션에 떨어질 만큼 말아먹지는 않는데, 인정받는 자리를 차지하고자 달려드는 치열함도 없는 나에게 딱 맞는 위치였다. 중간은 의외로 많은 사람이 본다. 늦게 와서 오프닝을 놓친 사람도, 뒤쪽 사람을 보러 와서 기다리던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듣는다. 크게 책임지지 않아도 괜찮고 부담감이 덜한데 의외로 사람들이 꽤 많이 봐주는 중간 순서가 꽤 좋았다. 피날레로 장식하기 전 숨을 돌리는 그 자리를 지키면서 주역은 아니지만 저마다의 자리에서 반짝이는 사람들을 더 열심히 보게 됐다.
이 공간에서 내 닉네임은 Clemence. 프티파 안무 글라주노프 음악 헝가리 배경의 발레 <Raymonda>의 주인공 친구 중 1명이다. 아마 귀족쯤 되지 않을까? 백작 부인의 조카 레이몬다는 십자군 전쟁에 출정한 약혼자 장 드 브리안을 그리워한다. 꿈에서도 약혼자의 환상을 보는데, 그 환상 장면에서 친구들이 아기자기한 음악에 맞춰서 위로하듯이 춤을 춘다. 친구들은 성 안에서도, 레이몬다 결혼식에서도 춤을 춘다. 무사히 결혼에 성공한 레이몬다보다 더 상상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주인공들은 결혼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거나, 배신당해서 죽는다. 꽉 닫힌 엔딩 이후 주인공 친구들의 인생은 내 마음대로 펼칠 수 있다. 이 레이몬다 친구들은 콩쿠르에서도 마이너 작품이라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나오더라도 레이몬다 친구 바리에이션 (Raymonda friend variation)이나, 레이몬다 데이드림 첫 바리에이션 (Raymonda daydream 1nd variation) 정도로 명명된다. 당연히 전막 중에서 잘라낸 단독 영상을 찾기도 어렵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국내에는 이제 라이센스가 없는지 안 올라오는 작품이지만, 전막 영상물을 볼 때마다 어디쯤 나오나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주역 롤 이외에 애정 가는 캐릭터가 생긴다는 건 기쁜 일이다. 그러면서 더 많은 예술가를 알게 되겠지!
꿈속에 등장한 친구들. 2:50 정도부터 콩쿠르 단골 작품인 레이몬다 아다지오가 나오는데 약혼자를 향한 그리움에 환상까지 보는 장면이라서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절절한 그리움에 젖어서 아련하게, 최대한 긴 라인으로 표현한다고 하더라. 그에 비하면 친구들은 통통 튀고 발랄해서 상당한 대비감이 느껴진다.
클레망스 바리에이션. 이 공간에서 내 테마 컬러를 연보라색(#B5AEF7)으로 정했는데 마침 의상이 연보라색이다. 나긋나긋하고 서정적인 음악, 살랑살랑한 춤이 마음에 든다.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 Alexandra Khiteyeva의 레이몬다 데뷔 공연. 이 영상을 보고 닉네임을 결정했다. 내 스타일이야!
공식 설정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 미지수의 재미가 있는 인물의 이름을 달았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덜 유명하면 어때! 내 마음에 드는데! 팔자 센(?) 주인공들보다 친구 인생이 더 즐겁고 평온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해진 게 없으니 내 무궁무진한 상상 속에서 연애나 결혼을 안 시킬 수 있다. 취미도 많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잡다한 지식도 많아서 하나쯤 두면 즐거운 친구 포지션으로 이 글을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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