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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고전 음악의 규칙적 리듬, 낭만 음악의 템포 루바토

 많은 음악학자는 <리듬>을 음악의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원리로 본다. 리듬은 그리스어의 flow가 어원이고, 소리의 흐름과 움직임을 뜻한다. 박, 악센트, 길이, 규칙성, 반복이나 변화는 다 리듬이다. 음악=소리로 인식하기 때문에 귀에 닿는 '선율'을 더 먼저 듣기 쉽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셈여림도 흐름도 다 리듬의 일종이다. 이 리듬이 반복되거나 변형되고 연결되면서 음악이 구성된다. 심장 박동, 손뼉 치는 행위, 걸음걸이, 고개 흔들기, 말하기처럼 인간의 신체부터 자전과 공전, 동식물 소리까지! 자연 속의 연속되는 움직임엔 비트가 들어가서, 음악가에게 영감을 준다.

음악의 기원 중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서 고된 작업을 최소화했다는 학설이 있다. 우리말로 쓰자면 영차 영차! 요새로 치면 일종의 노동요! 또 각종 의식에서 쓰던 춤도 리듬이 기본이다. 선율과 리듬 중 어느 쪽이 원초적인지의 논쟁은 꽤 오래됐는데, 리듬이 선행되어야 음악이 생명력을 갖춘다는 쪽이 더 우세해 보인다.

음악학, 음악사, 음악교육학, 음악심리학 및 음악치료 교재에서도 주류 학자들이 리듬의 중요성을 설파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전업 지휘자는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는 말을 남겼다. 악보를 못 읽거나 음높이를 구분할 줄 몰라도 손과 발로 리듬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유아 음악 이론 맨 처음에도 음표의 박자 길이가 나올 만큼(과일 한 개 반 개 스티커와 함께!) 리듬은 음악의 원천이다. 심리치료도 드럼이나 북 같은 리듬악기가 많이 쓰인다. 충동을 통제하고 심장 고동을 안정시키는 역할이다.

귀에 딱 꽂히는 건 멜로디지만, 세련된 음색과 연주의 완성도는 리듬에서 나온다. 음악의 발전은 리듬-선율-화성 순으로 이뤄졌고, 시간예술인 음악을 좀 더 쫀득하게 구성 짓는 요소가 리듬의 변화이고, 음의 고저를 다이내믹하게 표현하려면 리듬을 듣는 게 중요하다. 또한, 음표만큼 쉼표를 예민하게 지켜야 음악이 살아난다. 쉼표도 소리 없는 음악이니까.

선율이 주를 이루는 악기에서도 리듬이 근소하게라도 무너지면 확연히 티가 난다. 특히 리듬이 일정한 고전 음악은 민망할 만큼 적나라하다. 지난 글에도 썼듯이 매우 치밀한 리듬을 준수한 안정감에서 명료한 소리가 나오는 모차르트나, 후기 바로크 색채와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아 짤막한 장식음이 많은 하이든, 상대적으로 변화무쌍하지만 아직 고전주의 특징이 강한 베토벤 초~중기 작품이 그러하다.

쇼팽, 슈베르트, 슈만, 멘델스존, 라흐마니노프 등의 낭만 음악은 좀 더 자유롭고 상념에 빠진 느낌이다. 물론 저마다 개성이 다르지만, 굳이 한곳에 묶어서 특징을 따진다면 상대적으로 규격이 덜 느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낭만 음악사에 특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쇼팽을 떠올려보자. 이왕이면 에튀드보다 발라드, 녹턴, 마주르카, 왈츠, 스케르초 등의 소품으로! 그의 곡은 우아하고 서정적이며 뉘앙스 표현이 풍부하고 감정적으로 느껴진다. 때로는 급격히 고조되며 분위기를 바꾼다.

하이든 소나타. 악보만 봐도 리듬이 규칙적으로 똑 떨어지고 정돈된 느낌이다. 명확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담은 곡.
제일 처음에 친 쇼팽 녹턴. 유연한 악보! 55마디와 59마디가 특히 재미있었다. 선율을 파악한 다음에 사라락 표현하기~!

고전음악을 깔끔하게 잘 살리는 사람들이 낭만 음악을 색채감 없이 밋밋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낭만 음악은 감동적이고 근사한데 고전음악은 유치하고 답답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연주가 기계적이고 지루하게 들렸다면 박자를 딱딱 지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규칙적인 리듬감이 부족한데 억지로 맞추려고 애썼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낭만주의 음악이 이전 시대 음악과 뚜렷하게 다른 점은 아고긱(agogic)과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기법이다. 아고긱은 본래 정해진 빠르기에서 벗어나서 음 길이에 변화를 주며 풍부한 색채를 주는 속도법이다. 템포 루바토는 시간 도둑질을 뜻하는데, 어떤 음을 임의로 강조하고자 다른 음에서 시간을 빌려오는 방식이다. 고전 음악도 템포 변화를 쓸 수 있지만 원래 박자 구성을 침범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으며 엄격하게 제한된 한도 내에서 이뤄졌다. 낭만주의 시대에 도달해서야 특정한 표기에 연연하지 않고 연주자의 해석과 주관적인 느낌으로 템포를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됐다.

언뜻 보면 리듬을 파괴해도 괜찮은 구성 같지만, 딱히 그렇진 않다. 모자란 리듬감을 숨기고자, 또는 멋들어지게 꾸미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이미 망가진 리듬 위로 루바토 흉내를 내면 곤란하다. 그만큼 우스꽝스러운 연주도 없다. 쇼팽은 바람이 불어올 때 나뭇잎과 가지는 흔들리지만, 기둥 자체는 꼿꼿한 모습을 루바토에 빗댔다. 나는 여기서 가볍게 살랑살랑 춤추는 나뭇잎은 오른손 멜로디, 덩달아 움직이는 가지는 왼손 반주, 지탱해주는 기둥은 전체적인 박자로 이해한다.

작은 음표들을 악보에 그려진 왼손 박자에 넣지 말고 원하는 대로 유연하게 맘껏 펼치란 말이 얼마나 신세계였던지!

대부분의 낭만 음악은 연주자의 자율성을 좀 더 인정하기에, 더 아름다운 흐름을 위해 악보의 정확한 연주에서 다소 벗어나서 나만의 개성적인 미적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장식음 하나만 봐도 고전과 다르게 넓은 음역에 더 선율적으로 들어간다. 음 하나를 임의로 좀 더 늘이거나 줄여도 된다. 정박에서 벗어나 흩뿌리듯이 섬세하게 연주해도 괜찮다. 이 역시 풍성한 표현이 일부러 어그러뜨린 <리듬>에서 파생된다.

바흐는 이미 친해지기를 포기했고, 모차르트는 아이가 치기엔 쉽지만 어른이 치기엔 너무 어렵다는 피아니스트 슈나벨의 말에 동조하며 하이든으로 넘어갔다. 두 작곡가의 유사성은 장조다. 하이든은 52곡 피아노 소나타 중 5곡, 모차르트는 17곡 중 2곡만이 단조일 만큼 장조를 주로 선택했는데, 하이든 쪽이 더 맑고 명쾌한 느낌이라서 꽤 매료됐었다. 그런데 점점 대책 없는 다정함과 딱 떨어지는 리듬의 따분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나마 더 다양한 형식을 시도한 베토벤으로 잠시 보완할 때, 뜻밖의 작품이 찾아왔다. 쇼팽의 다양한 소품이었다.

트릴이 많은 곡을 연주하고 싶어서 고른 녹턴이 시작이었다. 쇼팽 음악을 꽤 듣고 자랐고 위인전도 즐겨 읽었으면서 내심 나랑은 성격적으로 안 맞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고전 음악보다 훨씬 반응이 좋았다! 더 어릴 때 무심히 넘어갔던 마주르카도 잘 맞았다. 내 성격은 강박적인 리듬을 고수해야 하는 고전음악보단 좀 더 여백을 허용하는 낭만 음악 쪽에 가까웠다. 밝은 심상이 더 취향이라서 감성적인 단조는 안 맞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수확이었다. 정박으로 딱 떨어지는 고전 음악보단 서정성 강한 낭만 쪽이 어울리고, 전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날수록 더 듣기 좋다는 평을 받았다.

템포 루바토는 나에게 많은 해방감을 줬다. 자잘한 음형을 좀 더 마음대로 흩뿌려도 되고, 강조할 부분을 내가 정할 수 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 느낌이 더 개입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다양한 작곡가를 접하면서 차라리 규격에서 멀어질수록 스타일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규칙적 형식미랑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딱 떨어진 리듬에서 더 벗어날수록 해석이 즐거웠다. 더 즐거운 건,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일이다.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음악을 들을 때 리듬의 차이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고 상상하면 짜릿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