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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야심한 밤에 어울리는 드뷔시 피아노 소품 플레이리스트

가끔, 잠자기 전에 듣기 좋은 잔잔한 피아노 곡을 추천해달라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이는 더 구체적이다. 평화롭고 듣기 좋으며 너무 길지 않은 연주곡. 내 식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교향곡이나 협주곡은 규모가 크고 웅장해서 부담스럽고, 피아노 소리만 듣고 싶은데 그렇다고 또 소나타처럼 학구적으로 딱 떨어지는 곡은 답답할 때. 한마디로 정리하면 소품을 듣고 싶다는 소리다. 소품이란 광의적으로 봤을 때 규모가 작고 양식이 복잡하지 않으며 연주시간도 비교적 짧은 곡을 일컫는다. 이론적으로는 형식에 비교적 구애받지 않아 자유로운 곡을 뜻한다. 흔히 듣는 쇼팽 녹턴, 마주르카, 왈츠, 프렐류드 등이 소품에 속한다. 

밤 분위기에 취하고 싶다면? 뉴 에이지나 재즈보다는 클래식을 원하는데 기존의 형식미는 별로 안 끌린다면? 난해한 현대 음악도 싫다면? 확실한 대안이 있다! 드뷔시! 일단 그에 대해 탐구하도록 하겠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을 확립한 작곡가다. 19세기 말 후기 낭만과 20세기 현대음악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고전시대와 낭만시대의 기법인 선율과 주제를 확장시키는 것에서 벗어났으며, 짧은 모티브를 불규칙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간결한 주제는 결코 그 자체로 되돌아오지 않고 그 속에서 발전한다. 선율의 연속성이 다성 음악으로 포개진 성부에 스며드는 게 특징이다.  

 그는 파리 국립 음악원 시절 피아노로는 1등을 한 번도 하지 못했으며 화성학에서 낙제한 적도 있으나, 개성적인 연주와 작곡에 능통했다. 곡의 내부에 내면이 섬세하게 녹아들어 있으며, 곡에 붙여진 제목은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피아노는 드뷔시의 음악세계를 다채롭게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력한 도구다. 풍부한 감정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드뷔시의 곡은 20세기 초 피아노 음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희미한 음형의 조화는 섬세한 표현을 돋보이게 하며, 페달로 다양한 음색을 나타내고, 어렴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곡 전체에서 회화적인 색채감을 유감없이 발휘한 드뷔시는 피아노를 통해 관현악부터 오르간의 음색까지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드뷔시가 추구하는 이상적 음악세계는 전통적이며 기능적인 규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섬세한 감정과 다양한 다이내믹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진 자원에 대해 얼마나 능통했는지 알 수 있다. fff부터 ppp까지 폭넓은 음량을 요구하며, 변동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한다. 한 성부는 타악기와 비슷한 기법, 다른 성부는 노래를 하는 등, 미묘한 변화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며 모든 소재를 교묘하게 배열했다. 피아노란 악기의 음악적 재료를 사용하여 다양하게 표현하고 독특한 어법으로 취급하며 인상주의적 기법을 확립함과 동시에 이국적인 요소를 도입한 드뷔시는 서양음악에서 이어져 오던 어법과는 다른 새로운 음색과 음향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색다른 음악 시도는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20세기 이후 작곡가 중에 드뷔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곡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만큼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증거다.  희박한 조성 안에서 은근한 암시로 곡의 흐름을 표현했고, 음악적 색채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서 세밀한 표현을 꾀했다. 드뷔시가 살던 시대는 이미 피아노가 많이 발달되어 있었기에 악상에 충실하며, 화성의 변화를 귀로 들으며 음색을 만들었다. 

드뷔시는 자연물에 대한 애착이 강했는데, 특히 바다에 대한 향수를 오래 간직했다.

이제부터 듣기 편한 드뷔시 소품을 몇 곡 추천하겠다. 아직 낭만적 색채가 남아서 평온한 마음으로 듣기에 제격인 초기 소품 위주로 엄선해서 다룰 예정이다.

youtu.be/VKGRssiqKV0

꿈, 몽상, 백일몽 (Reverie)

매우 초기에 작곡된 소품이다. 청년 시절의 드뷔시에게는 아직 낭만풍이 상당히 남아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꿈결 같은 주제의 선율은 평온한 듯 은근한 기복이 존재한다. 대조적인 화음이 교체되고 A장조에서 E장조 그리고 C장조로 조심스레 바뀐다.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면서 끝까지 로맨틱함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조성을 흐릿하게 하려는 의식적인 시도도 엿보인다. 꿈꾸듯 몽롱하면서 아련한 곡이다. 짙은 색이 나오지 않고 연한 톤으로만 쭉 이어지기에 더 서정적이다. 

https://youtu.be/9Fle2CP8gR0

아라베스크 (Arabesque)

역시 초기 작품. 아라베스크란, 미술에서는 곡선으로 얽힌 덩굴 모양이자 아라비아풍의 기하학 무늬, 발레에서는 한 발로 서서 다른 쪽 다리를 들고 두 팔을 넓게 펼친 기본적인 포즈를 뜻한다. 음악에서는 장식적이고 환상적인 소품에 주로 붙인다. 시각적인 선율을 독자적으로 완성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는 특히 1곡이 매우 유명하다. 사랑스럽게 반복되는 아르페지오, 세련된 감각은 마치 하프 연주를 듣는 듯 유려하다. 실제로 위의 꿈과 함께 하프 및 다른 악기로도 잘 연주되는 편이다. 잔물결이 스치고 실바람이 부는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듣게 된다. 리드미컬한 2곡은 1곡에 비해 연주가 많이 되지 않지만, 들을수록 귀에 착 감긴다. 좀 더 동적이라서 생기발랄하고 싱그럽다. 이후 드뷔시의 음악적 색채와 어법을 암시하는 살롱 풍의 곡이다. 

https://youtu.be/97_VJve7UVc

달빛 (Claire de lune)

역시 너무나도 많이 알려진 곡이다. 개인적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월광, 드뷔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달빛이라고 번역한 게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곡 분위기에 어울리는 어감이다. 베토벤은 moonlight란 제목을 직접 붙이지 않았으나 일단 넘어가자. 베토벤 소나타가 어딘가 光을 넘어서 狂적이라면, 이 드뷔시의 달빛은 은은하게 빛나는 달무리가 떠오른다. 베토벤이 서슬 퍼런 달이라면 드뷔시는 신비로운 은빛 달이 연상된다. 청보랏빛을 띤 하늘에 얇게 뜬 달을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음악이다. 유동적인 화성과 온음계적인 선율이 아름답다. 자연을 예찬하던 드뷔시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신비롭게 일렁이는 얄따란 베일이나 보드라운 감촉의 스카프가 나풀나풀 넘실대면서 음을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  

https://youtu.be/7M4KfSf9FfA

슬라브 풍 발라드 (Ballade slave)

그리 자주 연주되는 편이 아니다. 드뷔시 초기 피아노 소품의 우아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져서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낭만 음악의 색채와 드뷔시 특유의 모호한 음형이 적절히 안배되어서 감미롭고 포근한 곡이다. 러시아 여행을 다녀와서 쓴 곡으로 러시아 음악의 색채도 드러난다. 학자들은 꿈이나 아라베스크보다 더 이른 시기에 작곡됐으리라고 추정한다. 잔잔하지만 밀고 당기는 매력이 느껴지는 곡. 드뷔시 어법이 제대로 확립되기 전의 곡이라 미학적 이상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으니 더 원숙미 넘치고 뛰어난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길 바란다는 평도 있다. 물론 연주를 전공하거나 문헌을 공부할 때 필수적으로 다룰 곡은 아니다. 그러나 감상자 입장에선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https://youtu.be/x-8fl-Ys9r8

낭만적인 왈츠 (Valse Romantique)

상당히 센티멘탈한 정서가 깔린 곡. 역시 초기 소품에 속한다. 이 곡도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아니지만 몽환적인 분위기로 감상하기에 적합하다. 을씨년스럽고 우중충한 날씨일 때, 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내릴 때, 괜스레 분위기를 잡아보면서 듣기 좋은 곡. 짤막한 작품이지만 그 안에서 몇 차례 느껴지는 변화가 매혹적으로 들린다. 드뷔시적인 면모가 아직 덜 드러나지만, 감상적인 느낌이 드는 춤곡이다. 

https://youtu.be/F5dK6rO3fbY

야상곡 (Nocturne)

드뷔시도 녹턴을 작곡했다는 사실! 러시아 풍취가 느껴져서 러시아 집시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하는 곡이다. 마스네의 선율, 그리그의 화성에 가까운 음까지, 실험적인 초기작으로 다양한 영향을 받은 곡이다. 존 필드나 쇼팽의 녹턴처럼 우수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어떻게 보면 습작기와 형성기 사이의 곡이라 아직 스타일이 명확히 확립되지는 않았다. 밤의 고즈넉한 풍경을 그러모으면서 편안하게 감상하기엔 무리 없는 곡이다. 관현악곡 녹턴과 비교하면서 들어도 좋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을 감상해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https://youtu.be/vD-VsJOL8CY

렌토보다 느리게 (La plus que lente)

렌토는 직역하자면 느린 템포를 말하지만, 맥락을 따져보면 그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서 유행하던 느린 왈츠에 속한다고 한다. 드뷔시는 표제를 매우 예민하게 붙인 작곡가이니 의도를 존중하면서 감상하는 게 좋겠다. 엄연히 말하자면 후기에 들어가는 곡이지만 예외로 넣었다. 이미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원숙한 모습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드뷔시 특유의 감각적인 색채미가 돋보인다. 미묘한 뉘앙스와 세련된 색채감이 노련하게 묻어나온다. 아주 새롭고 특별한 기법이 쓰인 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고요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한없이 나른해지고 싶을 때 추천한다.

쉬어가고 싶을 때 듣기 좋은 곡 위주로 골라보았다. 물론 드뷔시의 모든 곡이 다 이런 분위기는 아니다! 특별히 마음을 가라앉히기 좋은 곡들로 선정했다. 아침보다 새벽, 낮보다 밤을 더 좋아하는 야행성에게 어울리는 곡들이다. 오늘 밤은 드뷔시 소품과 함께 하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