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정기공연 <오네긴>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0년 7월 18일 저녁 7시
타티아나 : 강미선
오네긴 : 이동탁
올가 : 홍향기
렌스키 :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그레민 공작 :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
존 크랑코의 드라마 발레 <오네긴>은 수줍음이 많고 독서를 좋아하던 시골 소녀 타티아나의 성장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은 오네긴이지만,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보는 시선으로 이뤄져 있다. 발레는 특성상 여성 무용수가 극을 이뤄나가는 게 많으며, 페어 이름을 적을 때 여성 주인공 이름을 맨 앞쪽에 배치한다. 오네긴 역시 푸쉬킨의 원작 제목을 썼지만, 타티아나 감정의 흐름과 오네긴을 대하는 태도 변화에 주안점을 두고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꿔서 말하면, 오네긴 캐릭터 설명이 다소 불친절할 수 있다. 그렇기에 캐릭터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 원작에서도 오네긴은 감정선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대사가 없는 발레에서 구현하기는 더 까다롭다. 특히 이 작품은 클래식 발레와 달리 마임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내용 전개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졌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타티아나가 왜 오네긴에게 빠져들었는지 관객이 납득하려면 오네긴 역할의 캐릭터 해석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비주얼이 개연성이 된다거나, 포스가 대단하거나, 걸음걸이 하나만으로도 압도하거나. 그렇기에 오네긴을 맡은 무용수는 테크닉 겸비는 물론이고, 그만의 개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시시껄렁한 망나니나 단순한 불량배로 보이기 쉽다. 갱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관객이 충분한 매력을 느낄 포인트가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 오네긴의 오만하고 차가운 면모와 함께 귀족적인 표현을 연구해야 된다. 평면적이고 정형화된, 그저 그런 못된 놈으로 보이면 곤란하다.
타티아나 역시 표현이 어려운 캐릭터다. 순진무구하고 조용하던 소녀가 오네긴을 만나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오네긴은 특히 캐스팅이 중요하다. 인물에 어울리는 분위기는 물론이고 탄탄한 기본기와 훌륭한 테크닉은 기본적으로 깔아야 하며 각자의 표현력과 서로의 합에 따라 만족도가 결정된다. 재단에서 캐스팅을 관여하기에 티켓 오픈에 비해 발표가 늦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이번엔 특히 더 미뤄져서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여유가 되는 한 티켓을 잡고 또 잡아가면서 기다렸다. 올초엔 해외 게스트나 신인 데뷔를 내심 기대했으나 그럴 만한 형편이 아니라 더블 캐스팅으로 끝난 게 아쉽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최선의 조합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드디어 올 것 같지 않던 날이 왔다!
막이 오르면 평화로운 정원이 나타난다. 오네긴은 차이콥스키의 여러 음악을 편곡해서 사용하는데, 서곡은 사계 중 2월 카니발이다. 이 음악이 이렇게나 풍성하게 들릴 수 있다니? 타티아나의 운명 암시에 잘 어울리는 선곡이다. 활달한 여동생 올가는 책만 읽는 언니의 관심을 유도하며 주변을 맴돌고 파티복을 보여주는데 타티아나는 큰 관심이 없다. 건강하고 수다스러운 올가와 홍향기 무용수는 인상부터가 잘 어울렸다. 미래의 남편감을 알려준다는 거울점을 보던 타티아나는 갑자기 등장한 오네긴에 깜짝 놀란다. 오네긴은 올가의 약혼자인 렌스키의 친구지만, 아주 반대되는 이미지를 가졌다. 렌스키가 부드러운 온미남이라면 오네긴은 거만한 냉미남쯤일까? 그 이후 이어지는 렌스키의 가볍고 보송보송한 춤을 보면 타티아나는 야들야들한 동생 약혼자만 보고 살다가 전혀 다른 타입의 남자를 만나서 끌렸겠구나 싶다.
오네긴과 산책을 나간 타티아나의 설레고 들뜬 모습을 나타내는 강미선 무용수의 표현력은 일품이다. 그에 비해 오네긴은 퉁명스럽고 무심한 모습을 보인다. 타티아나가 읽던 책을 슥 들춰보지만, 어떤 책을 읽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부분에서 자기 자신만 중요하다고 증명하듯 자아도취에 빠진 춤을 추는 오네긴도 봤는데, 이동탁 무용수는 일견 정중해 보이면서도 타티아나와 다른 온도를 나타내듯 냉철하며 상념에 빠진 모습을 유지했다. 타티아나는 첫사랑에 흠뻑 빠져서 오네긴만 응시하지만, 둘의 시선은 철저히 엇갈린다.
그렇기에 타티아나의 꿈에 등장한 오네긴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달뜬 마음으로 연애편지를 쓰며 유모가 볼까 부끄러워하는 타티아나의 연기는 정말 사랑스러우면서 안타까웠다. 안 돼! 편지 넣어둬! 착각이라고! 우리의 타티아나는 망상을 하며, 꿈속에서 오네긴을 만난다. 일명 거울 파드되! (이 장면에서는 거울 역할을 타티아나와 체격이 비슷한 무용수가 맡는데, 마치 거울에 비친 한 사람인 양 동시에 움직인다. 짧게 지나가는 순간이지만 알고 보면 더 흥미롭다.)
꿈속 장면은 타티아나의 사랑에 대한 숨겨진 열망이 강렬하게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책만 읽을 때 알아봤어! 꿈에 등장한 오네긴은 실제와 달리 타티아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농밀하게 이끌어주는 모습을 보인다. 즉, 타티아나의 이상형 그 자체로 나오기 때문에 오네긴이 철저히 그 소망에 맞춰줘야 한다. 박진감 넘치는 고난도 리프트가 이어지는데, 힘든 티는 나지 않아야 더 몰입된다. 이동탁 무용수는 특히 리프트에 강하고 테크닉이 안정적이어서 환상적인 안무를 안심하고 볼 수 있었다. 또한 강미선 무용수의 농축된 내면 분출은 물이 올라서 감동적이다.
누가 그랬던가. 새벽 감성에 글을 쓰지 말라고. 호감 정도인 사람이라도 꿈에 나오면 갑자기 더 관심이 가고 좋아하는 마음이 커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타티아나는 이미 첫사랑을 시작한 상태였고 꿈에서 유난히 요란스러운 로맨스를 연출했기에, 더 폭주하는 감정을 담아 편지를 썼을 것. 현실의 오네긴은 시골 생활에 마음이 식어가서 권태감을 느끼는 중이었기에, 답답하고 촌스럽기만 한 타티아나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기대하듯 맴도는 타티아나를 성가시단 듯 쳐내며 단호하게 편지를 돌려준다. 영문을 몰라서 몇 번이고 다시 건네는 타티아나는 금방이라도 울 지경인데 뒤에 서서 편지를 찢으며 손에 올려주기까지 한다. 심지어 타티아나의 생일에! 야멸치게 종이를 박박 찢는 소리가 얼마나 실감나던지! 좌절한 타티아나는 풀이 팍 죽었는데, 파티에 온 사람들은 저마다 신나게 즐기는 게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무료한 일상에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오네긴의 깽판은 그 정도에서 멈추질 않는다. 구석 테이블에서 혼자 카드놀이나 할 때가 나았다. 친구의 약혼녀인 올가에게까지 밀착하며 장난을 거는데, 진지하고 차분한 언니와 달리 장난기 넘치고 명랑한 올가는 다소 철딱서니 없게 느껴질 만큼 그 접근을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준다. 이 둘은 평소 자주 만나는 페어인 덕분에 춤의 호흡이 딱 맞고 활기차게 흘러갔다. 렌스키는 격렬한 질투를 느끼고 떼어놓지만, 놀리는 일에 맛 들린 오네긴은 계속 올가에게 지분거린다. 렌스키의 토라진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귀엽게 앵돌아진 모습 때문에 다들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던 게 아닐까!
부글부글 끓던 렌스키는 장갑으로 오네긴의 뺨을 연거푸(!) 때리는데 마치 일일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찰지게 때리던지! 왜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는지 알 수 있었다. 뒤쪽에 중년분들이 계셨는데 진짜 드라마 보듯 신나서 리액션을 하셨다. 이 장면의 막장 코드는 하나 더 있다. 렌스키가 장갑을 던져서 결투를 신청하자 자매가 번갈아가며 말리는데, 타티아나 역할의 강미선 무용수와 렌스키 역할의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무용수는 실제 부부 사이다! 이 현실 관계와 섞어서 보면 더 웃음 터지는 구간이다. 부부가 한 무대에 등장해서 다른 이의 파트너로 활보하다니! 부부 호흡보다 더 신선하다. 렌스키 이미지에 더 어울려서 이 캐스팅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한 무대에 묶어두니까 더 재미있다. 올가와 서로 다른 스타일이라 언밸런스한 듯 은근히 어울리는 느낌. 생기발랄하지만 어딘가 눈치 없는 왈가닥 약혼녀를 둔 섬세한 음유시인!
소품도 중요한 장치다. 1막에선 설레는 타티아나의 마음을 대변하듯 푸르른 나무가 보이고, 2막은 앙상한 나무를 배경으로 렌스키가 쓸쓸해 보이는 독무를 펼친다. 렌스키는 결국 오네긴과의 결투에서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자고로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해! 남자의 자존심과 명예가 다 뭐라고! 렌스키가 더 마음에 들었기에 퇴장이 아쉬웠다.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사무치게 경멸하듯 쏘아보는 장면에서는 냉기가 흘렀다. 상상 속의 사랑이 어그러지는 표정이다. 이제 환상은 산산조각났다.
하이라이트는 3막! 잉여스럽게 세계를 돌아다니던 오네긴은 상트페테부르크로 돌아와서 그레민 공작의 무도회에 참여한다. 공작과 함께 우아하게 춤추며 공간을 장악하는 붉은 드레스에 시선이 가는데, 다름 아닌 타티아나다. 매정하게 저버린 타티아나! 촌티 나고 따분해 보였던 시골 소녀가, 기품 넘치는 공작부인이 된 것. 짧은 순간에 둘의 시선이 교차하며 팽팽한 긴장감이 넘쳤다.
후폭풍 세게 맞은 오네긴은 이제라도 매달려보기로 결심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 인간은 비상식적이다! 공작부인을 상대로 불륜을 조장하다니?) 여행하고 방황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훅 가고 확 삭은 오네긴보단 점잖고 매너 있는 그레민 공작이 낫지! 과거에 매몰되어서 지나간 인연에 목숨 거는 오네긴과 달리 타티아나는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책에서 본 사랑을 동경하던 풋풋한 소녀는 온데간데 없고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른이 됐다.
자존심을 버리고 타티아나의 방으로 찾아와서 애걸복걸하는 3막 회환의 파드되 장면은 매우 통쾌하다. 동요하던 타티아나는 무릎을 꿇고 매달리고 잡아끄는 오네긴을 보며 과거의 감정을 떠올리는 듯 잠시 복잡한 심경을 보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 타이밍은 예전에 엇갈렸다. 타티아나를 잡아당기고 달라붙는 찌질한 연기가 잘 어울렸다. 현명한 타티아나는 속 시원한 방식으로 복수를 하는데! 바로, 오네긴의 고백 편지를 매몰차게 찢어버리는 것! 사랑의 환상에 빠졌던 과거를 끊어내듯 꿈속 거울 파드되와 동일한 음악이라 인상적이며, 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종이가 쫙쫙 소리내며 찢겨나가는 모습을 오네긴은 믿을 수 없단 듯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본다.
타티아나는 당장 사라지라고 하는데, 이 안무가 매우 직관적이다. 손가락을 뻗어서 바깥을 가리킨다! 마치 내 인생에서 이제 나가달라는 대사가 들리는 양 단호했다. 이제 사리분별이 명확한 어른이니까 더는 휘둘리지 않는다. 강미선 무용수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엇갈린 운명과 파국에 잠시 오열하지만 훌훌 털어내고 당당한 모습으로 잘 살아나갈 모습이다. 오네긴 놈은 뭐 계속 삽질하면서 인생 낭비하든지 말든지!
이 작품은 그 어디도 허투루 넣은 장면 없이 알찬 게 장점이다. 미처 못 쓴 장면도 다 즐거운 포인트다. 클래식 발레는 어렵고 지루하다고? 아카데믹하게 이어지는 춤과 내용과 상관없는 디베르티스망이 적응 어려운 사람에게 딱 맞다. 반대로, 테크니컬한 춤을 추는 클래식에 익숙해서 스토리 진행 위주일 것 같은 드라마 발레는 별로라고? 오네긴은 테크닉과 연극적 요소를 적절히 안배했다. 특히 마을 사람들이 재빠른 그랑 쥬떼(grand jete : 높게 뛰는 공중 점프)로 무대를 가로지르는 군무는 희열이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부분 중 하나다. 안무 난해한 드라마 발레 보고 편견이 생겼다고? 걱정은 넣어두시라. 오네긴은 이해가 쏙쏙 된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충분한 무대였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올해 첫 전막을 올려준 게 고마울 따름이다. 심지어 몰입도까지 넘친다! 주인공이 죽지 않는 발레도 보고 싶다? 옛날 옛적 이야기나 비현실적인 판타지는 관심이 덜 간다? 그렇다면 비교적 더 사실적이며 현대적인 오네긴을 보시라! 막장 드라마보다 뒤끝이 깔끔하고 만족스러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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