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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스트리밍 시대의 발레 관람 <대한민국 발레축제 유니버설발레단 갈라>

 처음으로 발레를 보기 시작했을 땐, 공연이 참 적었다. 지금도 다른 장르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그 시절은 진짜 뭐가 없었다. 심심하면 영상을 순서를 외울 만큼 돌려보던 때였다. 지금처럼 고화질이 아니었음에도 볼 수 있단 자체에 만족했다. 주요 부분을 편집해 올리면서 생각했다. 온종일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될 만큼 영상이 많아지면 좋을 텐데. 그 시절 국내 발레 영상은 조악하기 그지없어서 뿌옇고 멀고 가끔은 화면이나 소리가 깨졌다. 그래도 감지덕지했다. 

바야흐로 유튜브 시대가 도래했을 때 나는 편집을 그만뒀다. 굳이 따로 만들지 않아도 유명 발레 클립은 얼마든지 올라왔으니까! 세상의 변화는 항상 내 상상보다 빠르다. 내가 영상을 더 많이 보고 싶다고 불평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꽤 다양한 영상을 보게 됐다. 이제는 흔한 작품 말고 희귀한 작품과 새로운 안무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2020년, 내 소망은 엉뚱하게 이루어졌다. 발레 스트리밍의 포화 상태가 왔다. 전 세계를 강타한 바이러스로. 분명히 최신 영상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공연 대신이라니! 물론, 꼭 보고 싶었던 무용수를 고화질로 보는 건 반가운 일이다. 새로운 작품으로 내 취향을 재정립하는 기회도 가졌다. 처음에는 마냥 신나서 챙겨봤는데 영상이 아름다울수록 점점 안타까웠다.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까.

그러던 중에 몇 달 만의 공연인가. 유니버설발레단 발레축제 참가작! 2월 초 스폐셜 갈라를 마지막으로 몇 달을 줄줄이 취소당하는 바람에 조마조마하면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공연 당일이 다가왔다. 원래는 돈키호테 예정이었으나 또 갈라를 올리게 됐고, 지난번 갈라와 일부 프로그램이 겹치는 건 아쉬운 점이었으나 변경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공홈에 친절하게 설명해줘서 납득할 수 있었다. 4월 초 관람 예정이었던 잠미녀 3막 일부 오로라 결혼식 디베르티스망이 2부 공연이라니, 이 와중에도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려고 애쓴 흔적이 보였다.

swan lake


 오프닝은 백조 아다지오였다. 개인적으로 갈라 프로그램은 흑조 쪽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구성 자체가 더 풍성하고, 바리에이션을 볼 수 있으며, 화려한 코다까지 흥겨운 분위기니까. 그럼에도 백조를 선택한 이유는 군무를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백조들이 양쪽에서 와르르 등장하는 그 순간, 그게 뭐라고 순간적으로 벅차올랐다. 진짜 공연을 보는구나 리얼한 느낌이 들었다. 몇 달간 공연을 못 보지만 않았어도 2월의 루치아 라카라, 매튜 골딩의 백조와 비교하며 감흥이 덜했을 텐데 관극에 굶주린 탓에 실제로 움직이고 숨 쉬는 무용수들이 바로 앞에 있단 자체로 설렜다. 여담이지만 지난 공연에서는 갑자기 생상스 음악이 흐르고 빈사의 백조 느낌의 날갯짓이 나오며 뜬금없는 동작이 이어져서 잠시 당황했는데 이번엔 빠졌다. 아마 루치아 라카라 특기인 폴드브라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던 모양이다.

 해적 파드트루아는 테크닉의 향연! 바리에이션도 코다도 온갖 종류의 턴이 등장한다! 서혜원 무용수는 어릴 때 대회장에서 꽤 봤는데(최근에 그 시절 콩쿠르 순서표 발견해서 펼쳐봤더니 이름에 따로 표시하고 감상을 써놨더라!) 미소가 상큼하고 손을 예쁘게 쓰고 동작이 탄탄했던 기억이 난다. 작년 호두에서도 느꼈지만, 여전히 표정이 화사하다. 메도라 튜튜가 신비로운 하늘색이라서 더 마음에 들었다. 리프트가 많으며 호방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동탁 무용수의 해적 콘라드, 수려한 모습의 강민우 무용수의 알리. 전막으로 보면 더 재미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해적은 갈라보다 전막으로 보는 게 훨씬 즐거운 희극 발레인데, 작년에 올릴 예정이었다가 조용히 엎어진 작품이라 더 아쉬웠다.

 Le Corsaire pas de trois

RUTH, Ricordi Per Dues 작품은 알비노니의 익숙한 음악과 함께 서정적인 움직임과 아름다운 라인을 보면서 쉬어가고, 여운을 느낄 수 있다. 최지원 무용수는 큰 키와 특유의 차분한 이미지가 어떤 캐릭터엔 다소 제한적이던데 이 레퍼토리에선 길쭉한 라인과 고요한 분위기가 큰 장점이 되더라.  곧바로 이어진 우크라이나 민속춤 고팍은 발레리노 리앙 시후아이 무용수의 독무!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는 활기찬 안무라서 분위기 전환에 딱이었다. 공연 시작 전 단장님이 요새 해외 여행을 못 가니까 독일, 그리스, 미국, 우크라이나, 스페인, 프랑스 등 다양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발레를 감상하며 여행을 하자고 설명하셨는데, 그 콘셉트에 가장 적합했다. 짧고 굵고 임팩트 강한 춤. 이런 게 갈라의 장점이지!

잠시 한국 창작으로 돌아와서 심청 문라이트 파드되. 갈라에서 보는 창작은 춘향보다 심청 쪽이 더 몰입도가 높다. 음악과 안무가 더 드라마틱해서 짧게 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가까이서 보니까 쉬폰 의상도 참 하늘하늘 아름답더라. 강미선 무용수는 더 말해 뭐해. 클래식, 로맨틱, 드라마 할 것 없이 다 색채감 있게 소화하는 수석이다. 테크닉과 표현력을 겸비해서 어디서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파드되가 너무 짧아서 아쉬웠다.

1부 파이널은 돈키호테 3막 그랑파였다. 키트리를 맡은 손유희 무용수는 어떤 콩쿠르 경연 전 몸을 푸는 참가자 사이에서 자그마한 몸집으로 유유히 트리플 턴을 돌고 웃어 보이던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 작품이 키트리였는데, 그 이후로 내게 키트리가 잘 어울린다는 인상이 남았다. 역시 살랑살랑 부채질하는 모습이 딱 맞더라. 결혼식 장면답게 흰 튜튜인데 머리의 붉은 꽃을 꽂아서 스페인의 정취도 놓치지 않았다. 단장님이 돈키호테에서 변형되는 기본 자세 시범을 보여주셨는데, 한쪽 팔은 자신감 넘치게 쫙 펼쳐서 손끝에 힘을 주고 한쪽 손은 허리를 짚는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 새롭지 않았는데, 이 부분을 듣고 집중하니까 다른 점이 보인다는 후기를 봤다. 초심자는 다리나 발 기교 위주로 보느라 미세한 차이를 못 볼 때가 있던데, 포인트를 알려주면 포착하기 더 쉬울 듯하다.

 Sleeping beauty


2부 잠미녀 웨딩도 해설이 많은 도움이 됐으리라고 본다. 단장님도 아카데믹한 작품이라 감상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짚어주고, 스토리보단 춤에 집중하면서 그림처럼 감상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는데 내가 올 초에 쓴 글과도 일맥상통해서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여섯 요정도 등장하는데, 이 구간에서 멍한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요정을 하나하나 다 설명해줘서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부드러움의 요정은 순수한 성품을 선물로 주는데 팔을 펼치는 동작이 많고, 활발함의 요정은 명랑한 성격을 선물하며 힘차게 점프하고, 빵가루 요정은 부스러기를 뿌리는 동작을 하면서 관용을 선물한다. 재잘거리면서 말솜씨를 주는 카나리아 요정,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열정을 선물하는 용기의 요정. 마지막으로 라일락 요정은 지혜로움의 상징이란 것까지, 각 요정의 개성적인 동작을 시범 보이면서 귀에 쏙 들어오게 설명하셨다.

라일락 요정의 이가영 무용수는 커다란 체구 덕분에 요정들의 리더, 공주의 대모란 설정에 잘 어울렸다. 서정적인 부드러움의 요정, 발랄하게 뛰는 활발함의 요정, 산뜻한 빵가루 요정, 센터에서 귀엽게 지저귀는 카나리아 요정, 절도 넘치는 용기의 요정의 춤이 끝난 후 마지막을 장식하는 라일락 요정의 동작이 시원시원했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파랑새 파드되가 본격적인 디베르티스망의 시작을 알렸고, 앙큼하고 사뿐한 고양이 춤 중에서 흰 고양이는 1부 백조를 맡았던 마라 바로스 무용수인데 이쪽이 훨씬 어울렸다. 늑대와 빨간 두건 소녀 춤은 내 예상대로 아리카 무용수였다. 어쩜 그리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지! 소녀가 떨어뜨린 꽃을 주우러 나온 꼬마 아역들도 존재 자체로 깜찍했다. 또 오로라 홍향기 데지레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페어는 예상외의 캐스팅이었다. 위엄 있고 당당한 공주와 섬세하고 여린 왕자의 만남이란 느낌.

red riding hood!! (모든 출처 UBC instagram)

잠미녀는 희망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비록 하이라이트만 보여줬으나 이 시기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전막에 대한 갈증도 일부 해소됐으며, 단원들이 현재 보여줄 만큼의 최선을 다하는 게 느껴졌다. 비록 베스트를 뽑아낼 수 없더라도 춤을 춘다는 자체가 기뻐 보이는 무대였다. 예전만큼의 몸과 기량이 바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서 처음 발레를 보던 시절을 떠올렸다. 예술학교 예무제나 학원 발표회도 쫓아가던 때였다. 정기공연 날짜가 뜨면 일정을 그에 맞추고, 맘에 차지 않는 부분이 보이더라도 공연을 보는 게 마냥 즐거워서 긍정적으로 감상했던 때였다. 요샛말로 하자면 열심히 착즙을 하던 그 시기의 느낌이 돌아왔다는 건 값진 일이다.

사실, 잘 찍은 영상은 1층 시야보다 더 선명하다. 무대 전체를 구석구석 볼 수 없는 대신 표정은 확실하게 보이니까. 1층 앞은 표정과 손동작이 잘 보이는 대신 군무 대형을 감상하기에 좋지 않고 자칫하면 발이 덜 보이는 단점이 있다. 10열 근방은 춤이 그럭저럭 잘 보이지만 확실한 표정을 구분하기엔 약간 어려움이 따른다. 뒤쪽이나 2층 이상은 군무 대형이 잘 보이는 대신 얼굴이나 세세한 디테일이 덜 보인다. 그렇지만, 그 단점을 보완해서 찍은 영상이더라도 실제 관극을 따라갈 수 없다.

언젠가 어떤 이는 레벨이 높고 화려한 해외 발레단 영상을 먼저 접해서 국내 발레단 공연은 만족스럽지 않다고 했는데 (무대보다 앞 사람 머리통들이 더 잘 보이는 자리에 앉으면 그럴 수밖에!) 그 의견에 공감할 수 없었다. 최근엔 더 그러하다. 다소 먼 자리나 사이드에 앉더라도 한 공기를 마시면서 움직이는 무용수를 보고 싶다. 잘 보이는 자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해서 막상 티켓팅이 뜨면 캐스팅이 늦는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캐스팅 조합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또 투덜거리겠지만 말이다.

좌석을 띄워서 예매를 여는 바람에 티켓팅이 발레답지 않게 치열해졌으나 (이미 선택된 좌석이라니! 연석 잡기가 어렵다니!) 긍정 회로를 돌리자면 반으로 줄어든 인원과 탁 트인 시야 덕분에 꽤 쾌적한 관람이었다. 그렇지만, 무대에 선 사람의 시야는 어떨까? 북적이는 객석이 그리울 게 분명하다. 평온한 일상이 돌아오길 바란다. 열 개의 영상보다는 실감나는 공연 하나가 더 소중하다. 방구석 1열이 아닌 현장에서 전막을 감상하는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