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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베이킹, 취미로만 하고 싶습니다!

오븐을 집에 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이다. 겁도 없이 어마어마한 양의 초코칩 쿠키와 머핀에 도전하고선 상당히 괜찮은 결과물에 만족했다. 당시 사진을 다시 찾아보면 모양은 울퉁불퉁하고,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꾸민답시고 뿌린 스프링클은 시각적으로나 식감으로나 없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도 첫 시도치고는 선방했다. 몇 번 망치는 사람도 있다는데, 처음부터 꽤나 먹을 만했으니까! 반죽이 덜 익거나 타지도 않았다. 20인분 정도를 포장해서 나눠줬는데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친구의 덕질 메이트는 스탠딩 콘서트 도중 당 떨어질 때마다 오독오독 맛있게 먹었다며 인사를 전해왔다.

슬슬 새로운 베이킹에 도전하고 싶은데 감이 안 잡히던 때, 후배가 브라우니를 먹어보고 싶은데 구워줄 수 있겠냐고 했다. 그 시절의 난 빵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안 먹어본 게 많았고, 브라우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느낌인지도 모르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만들어볼게. 다음주에 날 잡아! 참, 무슨 배짱이었는지.

집에 굴러다니던 요리책과 인터넷을 뒤지면서 레서피를 참고했다. 이전부터 집에 있었던 <우리 아이 영양 간식> 책은 설명이 빈약했고 <야채 안 먹는 아이 맛있게 속이기 : 맛있는 야채 홈베이킹> 비슷한 제목의 요리책엔 무려 당근과 시금치 퓨레가 들었다. 여러 레서피를 보며 절충했다. (당연히 야채는 안 넣었다!) 인터넷은 박력분을, 책은 중력분을 추천했다. 혼란 속에서 어떤 밀가루를 선택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난 초콜릿을 중탕하고 냉동실에 돌아다니던 땅콩 아몬드 분태를 집어넣어서 브라우니 비슷한 빵을 만들어냈다. 후배는 정말 부드럽고 깊은 맛이 느껴진다며 만족했다. 브라우니는 좀 더 쫀득하고 꾸덕한 식감의 디저트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기존의 브라우니와 좀 달랐을 텐데 맛있게 먹어준 덕분에 자신감을 얻지 않았나 싶다.

각종 케이크, 페이스트리, 파이, 크로와상, 발효빵까지 손을 뻗으니 집은 매일같이 밀가루 천지였다. 슬슬 내 주변인이 감당할 양을 넘었다. 앞서 썼듯이, 난 사실 빵을 그렇게 많이 먹는 편이 아니다. 심지어 내가 만들고 안 먹어본 적도 있다. 근데 왜 만들었냐고? 완성되는 게 신기하니까! 먹인 다음에 반응 보는 게 즐거우니까! 초반엔 나갈 때 나눠주려고 베이킹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눠주러 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상당한 주객전도였다.

꽤 초기 작품. 10년 전 어느 날, 수제 블루베리 잼 파이. 후렌치 파이 느낌을 내고 싶었다!
피칸 호두 파이. 역시 옛날 디카 사진. 최근엔 귀찮아서 사진도 안 찍음.

부모님은 냉동실을 가득 채우는 베이킹 재료에 혀를 끌끌 차면서도 친척들이나 이웃, 또 교회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자랑을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어르신들의 간섭에 시달린 것은……. 중년분들은 맛이 좋다고 칭찬하면서도, 단순히 취미로 빵을 굽는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진로를 빵으로 정한 게 아니라고? 학원 다닌 적도 없다고? 내다 팔아도 되겠는데 장사할 마음은 없어? 어, 왜죠? 혼자 만들고 놀면 안 돼요? 사람들은 한동안 안부인사처럼 빵 이야기를 했다.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자격증. 기술 가지고 있으면 좋으니까 혼자 놀지 말고 정식으로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라는 소리다. 모처럼 재미있는데 괜히 전문적으로 배웠다가 질리면 취미를 잃는 셈 아닌가! 평가받지 않고 쉬엄쉬엄 할 수 있는 취미인데! 물론 살면서 생각이 바뀌기도 하는 법이니 어느 날 갑자기 자격증에 도전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 근데 떠밀리듯 하고 싶지는 않다.

카페 타령도 있다. 바리스타 자격증 따서 카페를 차리라는 소리다. 빵을 계속 만드는 게 힘들면 커피 팔면서 몇 개만 곁들이면 되고, 디저트 카페 차리면 더 좋고.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난 커피를 못 마신다. 아주 소량은 괜찮지만 굳이 찾지는 않는다. 커피가 들어가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오며, 향조차 괴롭다. 어차피 기술이니까 안 마셔도 기능만 배우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좋아하는 사람도 지치는 일이라던데, 싫어하는 커피를 내리면서 어떻게 살아요. 어떤 게 맛있는 커피인지도 모르는데. 5도짜리 칵테일 마셔도 취해서 술을 멀리하는 사람한테 조주기능사 따서 바 차리라는 소리를 하는 셈이라고 비유했더니 카페는 또 다르단다. 일부 사람들은 카페를 만만하게 보는 모양이다. 빵도 만드는데 커피는 더 쉽지 않겠냐, 너 체구에 빵집은 무리니까 카페를 차려라. 커피는 머신이 다 내려주는데 뭔 힘이 들겠냐. 카페, 중노동인데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또 많은 유형으로는 인터넷 만능주의다. 그 뭐냐, 요즘엔 인터넷에서 팔 수도 있다더라. 빵집 못 차리겠으면 어디 올려서 팔아봐라! 저기, 식품 파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배송 중 품질 변화 등 변수도 고려해야 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서 골치 아픕니다. 전 그냥 취미라니까요! 돈 주고 파는 건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없잖아? 주민센터에서 블로그 운영 수업 듣고 파워블로거 해서 돈 벌어보라는 소리도 들었다. 블로그를 꽤 오래 굴렸지만, 꾸준히 콘텐츠 만들어 올려도 파워블로거의 길은 멀었다. 수익 내는 블로그가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아나. 생활을 블로그에 맞춰야 하는데!

최근은 유튜브 권유까지 합세했다. 요새 유튜브가 대세라던데? 젊은 애들 아무렇게나 먹고 만드는 영상 찍어 올려서 돈 많이 벌더라. 세상이 이상해져서 요즘은 직장 안 나가도 돈 벌고 참 신기하지 않냐. 우리는 이제 뒤처졌지만 넌 젊으니까 금방 배우겠지? 빵 구우면서 찍어라. 앗, 촬영하고 편집하려면 충분한 공간과 장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다. 물론 센스가 남다르거나 운이 좋으면 폰으로 찍어도 뜨겠지만, 어디 쉽나. 유튜브로 구독자 늘리고 수익을 내려면 그만큼 내 사생활을 팔아먹어야 하는데!

그 다음으로는 SNS 홍보다. 가게 작게 내서 하루에 몇 개만 팔고 자유롭게 운영하면 안 되냐. 요즘에 SNS 운영하면서 장사하는 곳 많더라. 만들고 싶은 만큼만 전시해놓고 다 팔리면 닫아라. 어,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과연 그게 말처럼 쉬울까? 소위 인스타 감성이라고 불리는 디저트 카페도 고충이 많을 것. 한정적으로 문 열어놓고도 장사가 되는 집은 극소수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찾아올 만큼 맛있고 특별한 디저트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건물주라면 유동적으로 운영해도 먹고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건물이 없다!

처음 만든 유자 마들렌. 반응이 좋아서 자주 만들었다.

물론 팔아도 될 만큼 맛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차라리 지나가듯 던지거나 찬사의 한 종류로 말한다면 나도 적당히 넘어가겠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강요하고 날 야망 없는 사람 취급하는데, 현실성 없는 이야기들만 넘쳐나는 게 문제다. 젊은이들 번듯한 직장 정착 힘드니 재주 있으면 돈 벌어보라는 말의 기저엔 빵 굽는 일이 사무실 나가는 일보다 더 편하고 자유롭다는 인식이 깔렸다. 관련 사업 경험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직업으로 하는 지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말해줘도 말이 안 통한다. 심지어 옛날엔 몇 년 무보수 잡일하고 밀가루 포대 나르면서 구박받고 반죽 망쳤다고 발로 차이고 얻어맞아가며 배웠다는데 요새 애들은 끈기가 없다는 꼰대질까지 한다!

아직은 취미로 남기고 싶다는데 왜들 간섭일까? 가장 중요한 자본도 없다. 창업 자금 500만원씩 기부하든가! 아님 위치 좋은 곳에 가게를 내주든가! 취미는 실속이 없기 때문이란다. 이왕 만드는 거, 돈만 쓰지 말고 돈 남길 궁리를 해야 한단다! 관심이 있으면 본격적으로 써먹어야 한다는 오지랖이 피로해진다. 아, 그런 말하는 사람들은 직업 전환이 불가능한 취미에 더 가혹하더라. 나이 먹고 악기는 배워서 뭐에 쓰냐, 이제 와서 뭐 되기도 힘든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냐 등. 팍팍한 세상, 하나라도 즐길 게 있어야지.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쓸모 있는 행위는 얼마 안 남는다. 밥벌이할 일이 아니면 시도조차 하지 않아야 하는가? 인생엔 적절한 낭비도 필요한 법이다. 또한,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다.

초콜릿과 당근 컵케이크. 한 5~6년 전 선물로 가져갔던 것!

왜 취미로 베이킹을 하면 남는 게 없는가! 난 즐겁게 만들었고, 받은 사람은 맛있게 먹어줬고, 서로 기분 좋은 일 아닌가? 돈이 많이 드는 취미는 맞다. 각종 재료와 도구를 계산하면 차라리 사다 먹는 게 이득이다. 그럼 뭐 어떤가. 내가 원하는 만큼 만들어서 나눠주겠다는데. 100원도 안 보태준 사람들이 말이 많다.

요즘은 만드는 양이 줄었다. 새로운 베이킹에 도전하기 번거로워서 항상 익숙한 레퍼토리를 만든다. 최근엔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간과하고 장마철 베이킹을 시도했다가 눅눅해진 반죽을 살려내느라 고군분투했다. 온종일 보면서 다행히 잘 수습했지만, 가게 오픈 시간을 앞둔 상태라면? 매일 반복한다면? 상상만으로 아찔하다. 생업으로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다. 홈베이킹이라서 다행이다. 취미로 남기기엔 아까운 맛인가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역시 전 아직까진 취미로 두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