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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ence #B5AEF7

예술과 학문의 경계에서

-나중에 교수하는 게 어때요? 전공 교수는 부담스럽다고 할 거죠? 다 알아요. 내 말은, 교양 과목 강사요. 서양음악의 이해나 음악가의 연애담 강의하면 귀에 쏙쏙 들어올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말할 땐 재미없는데 님이 하면 재미있어요.

 소설 창작을 매개체로 만난 지인이 갓 대학에 입학한 나에게 한 말이다. 그의 어머니는 첼로를 전공한 음악 선생님이신데 가끔 내 음악 유머를 전해 듣고 깔깔 웃으셨다고 한다. 마침 난 뜬구름을 잡는 중이었다. 자기소개서 앞에서 순간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취미와 특기 칸을 채우고 보니까 몇 배로 넓은 칸이 나왔다. 희망 진로. 나는 연주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무난한 건 레슨 선생님이지만, 아이들을 잘 다룰 자신이 없었다. 음악치료사 어떨까? 그 커리큘럼을 배우려면 편입해야 하나?발레 음악 반주자도 괜찮겠다. 한국은 발레 피아니스트 별로 없잖아. 따로 배워야 하나? 썩 와닿지 않는 두 가지를 적당히 적으면서 펜을 돌리던 중이었다.

-어? 교수요? 상상한 적 없는데.
-왜요? 잘 가르치잖아요. 소설 속에 쓴 얘기하면 괜찮지 않아요?
-왜 베토벤이 24번 소나타에 샵을 많이 붙였을까, 월광은 정말 눈먼 소녀를 위한 곡일까, 이런 내용이요?
-맞아요, 바로 그런 내용. 사소하지만 중요하잖아요.
-와, 강의 제목 떠올랐어요. 음악가의 사생활! 

자기소개서엔 못 썼지만, 순간 혹했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는데 잘 모르는 학생 대상으로 강의하면 즐겁지 않을까? 음악 감상 시간도 갖는 거야! 안 그래도 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틀어주는 클래식 음악에 불만이 많은 터였다. 공교육이니 어쩔 수 없지만, 왜 흔한 음악만 감상시키지? 비발디 사계라거나! 교육과정에 없는 덜 유명한 곡도 들려주면 좋지 않을까? 음악가의 일화와 함께 알려주면 졸업하고도 친근함을 느낄 텐데. 그러나 내가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학교는 원래 재미없는 법이라고 넘겼다.

원대한 목표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으나, 입시 레슨을 오래 받은 사람들에 비하면 처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체계적인 실기 레슨으로 이뤄진 기본기와 테크닉은 따라가기 힘들다. 그 대신, 나만의 무기가 확고했다. 음악사 쪽 지식이 많았으며, 유아기부터 음악을 많이 들어서 곡을 잘 알았다. 음악 용어도 빠삭하고,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대학에 입학하면 교수님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예를 들면, 왜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는 분류가 복잡할까? 고전음악과 낭만음악의 경계는 어디부터일까? 왜 어떤 음악가의 곡은 음악적으로 훌륭한데도 잘 연주되지 않을까? 이야기꽃을 피우며 서로 분석하고 내 지식을 늘리고 싶었다. 물론, 한국에서, 특히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을 하면서 교수님과 수평적으로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잘만 하면 기회가 닿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터놓고 이야기하면 함께 연구하자는 분 하나쯤은 나올 거야! 헛된 망상에 빠졌다.

담당 교수 배정 오디션을 볼 때까지도 상당히 희망적인 상상을 했다. 뛰어난 학생만 맡는 교수님께 배정될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했다. 그렇지만 특히 기초가 부족한 학생들을 받는 교수님께 가야 할 정도로 뒤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결과는 내 예상대로였다. 그래도 서울음대를 나오고 미국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을 밟은 교수님께 배정됐다. 정교수가 아닌 분께 배정받은 동기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첫 만남은 싱겁게 끝났다. 언제부터 쳤는지, 입시 준비는 얼마나 했는지, 왜 고전 소나타 실기곡을 모차르트가 아닌 하이든으로 골랐는지 설명할 준비까지 하고 갔는데, 교수님은 딱히 질문을 하지 않으셨다. 곡 알아서 골랐어? 그래, 그렇게 해. 근데 얘, 바흐 출판사가 별로다. 다음에는 제대로 된 에디션을 가져와. 이게 들은 말의 전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교수님은 내게 큰 관심이 없었다. 누가 봐도 편애하는 동기가 따로 있었는데, 6세에 악기를 시작해서 개인레슨을 쭉 받았다고 한다. 클래스 레슨을 할 땐 훨씬 노골적이었다. 그 동기가 테크닉이 적은 곡을 고르면 충분히 할 수 있다며 더 어려운 곡을 독려했다. 어디서나 표현력 측면에서는 아쉽지만 기초가 탄탄하다는 평을 받았다. 

다음 실기곡은 베토벤 소나타였는데, 교수님은 그 동기에게만 따로 곡 추천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OO는 A와 B를 보는 게 어떨지? 내가 보기엔 B쪽이 더 스타일에 맞을 것 같은데 악보 읽고 연락하도록. 다른 학생들은 초기 소나타 ~번부터 ~번 중에 하나 고르라고 전하길 바란다.- 눈치 없는 동기는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고, 내가 원했던 곡이 그쪽에게 돌아간 사실을 알게 됐다. 흔하지 않아서 신선한 중기 소나타. 그에 비해 나에게 온 선택지는 흔한 초기 소나타와 더 흔한 비창이었다. (반항하듯 다른 곡을 했다!)

1학년 땐 거의 시간표가 짜여 나왔다. 이 말인즉슨, 별 관심 없는 실기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합창은 괴롭고, 반주법은 관심 없는 가곡이라 재미가 없었으며, 국악개론은 생소했다. 기대했던 음악사도 문제였다. 음악의 기원, 고대 음악, 중세 종교음악, 세속음악, 초기 르네상스 음악. 바로크는 거의 1권 막판에 탄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종교음악과 고음악에서 학을 뗀 전공자들이 꽤 많았다. (이제 그레고리안 성가 파트는 자다가도 외울 수 있다.)

첫 전공실기 학점은 B+. 아주 나쁜 점수는 아니지만, 딱히 좋다고도 볼 수 없었다. 내 기존 지식은 크게 쓸모가 없었다. 음악에 대한 배경을 잘 모르더라도 그저 실기가 뛰어난 쪽이 유리했다. A+나 A가 나온 과목들은 거의 학문적인 과목이다. 졸업할 때까지 그 모양이었다. 난 동기들이 눈이 풀리는 교육학이나 윤리학 시간에 쌩쌩했다. 그토록 원했던 토론은 일반 과목 교수님들과 했다. 그 교수님들은 신통하단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한 교수님은 가장 조리 있게 발표할 줄 아는 음대생이라고 칭찬하고, 어떤 교수님은 내 리포트를 공개적으로 읽어주셨다. 몇몇 동기는 날 명예 인문대생이라고 했다. 난 인문계 학교에서는 너무 특이하고 예민하며 멜랑꼴리한 예술인으로 통했다. 그런데 예술대에서도 신기하고 독특한 사람이 됐다. 난 도대체 뭘까! 이도저도 아닌 경계에 자리하나? 막상 일반대 친구들 사이에선 혼자 튀었다. 그들은 날 보면서 역시 우리랑은 다르다고 분리했다. 소속감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정체감의 혼란이 왔다.



각종 교수법, 피아노문헌, 악식론, 음악감상법, 음악심리학, 음악미학, 음악물리학 등의 과목은 아직도 기억할 만큼 흥미진진한데 지휘법은 지루하고(신기하게도 학점은 꽤 괜찮게 나왔다. 상대평가에서 모두 망쳤기 때문인가?) 성악은 안 맞고(음색이 가벼워서!) 부전공 관악기와 실내악에 취미를 붙여보고자 앙상블 동아리에 가입했으나 얼마 못 가 탈주했다. 호흡을 이루며 화음이 하나가 되는 짜릿한 기분은 잠시, 방학까지 연습에 매진하는 일에 질렸다. (악장님 죄송합니다.)

담당 교수님이 변해도 편안한 관계가 조성되지 않았다. 두 번째 교수님은 내 음악성을 호들갑스레 높이 평가했다. 이전 교수님은 왜 너한테 단순한 곡을 치게 뒀니? 뭐? 수월하게 가면서 타협했다고? 나 같으면 더 끌어올렸다. 소리가 곱고, 음감도 좋고, 느낌을 잘 살리는데? 안 되겠다, 에튀드로 테크닉 연습하자. 학구적인 곡을 더 해야겠어. 그런데 기대치가 너무 높아도 문제였다. 내가 못 따라올 때마다 교수님은 야망이 없다며 몰아붙였다. 넌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왜 악착같이 덤비지 않아? 너보다 훨씬 떨어지는 애들도 날 들들 볶는데, 왜 가능성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않니? 채찍질할수록 버겁고, 언젠가 실망하실 것 같았다. 교수님들은 왜 중간이 없을까?

무력함이 느껴졌을 때 음악으로 회피했던 내가 이번에는 다른 학문으로 회피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도서관에 틀어박히고 멀티미디어실을 배회하고 컴퓨터실에서 소설을 썼다. 레슨이 끝나면 학교 앞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재미로 버텼다. 내게 흥미를 유발하는 분들은 대개 시간강사였다. 지인이 내게 제안한 교양 교수가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나는 동기들이 모르는 음악 용어를 알려주고, 조별 과제 때 자료 조사와 정리, 발표를 도맡으면서 학점을 보장해주고, 각각의 연주 특성을 포착해 효과 좋은 곡을 골라주면서 자존감을 챙겼다. 내 곡은 제대로 못 고르는 주제에 남의 곡은 기가 막히게 잘 골라서 그들의 담당 교수님 의견과 일치할 때도 많았다. 이쯤이면 전공을 잘 택했는지 잘못 택했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가만, 예술과 학문을 접목하려면 역시 대학원인가? 근데 난 인맥도 없고 이미 학교란 공간에 지친 상태였다.

하나는 확실하다. 현재 한국 예술 대학 시스템과 난 맞지 않는다. 이론보다는 실기 위주로 굴러가지만, 막상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독보적인 몇 사람 외엔 실질적인 진로 지도를 받기 어려워서 맨땅에 헤딩하듯 혼자 해결해야 한다. 시스템이 특히 떨어진 학교인 줄 알았더니, 명문 학교에 다닌 분도 비슷하게 느끼셨더라.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었다니! 고질적인 문제인 모양이다.

-교수 안 할래요. 전공 교수님들이랑 안 맞아요. 편입 대학원 다 됐고, 졸업이나 빨리 하는 게 답이에요. 
-벌써요? 갑자기 왜요! 그러면 음악가의 사생활은 누가 가르쳐요!
-꼭 학교여야 하나요? 아무 곳에서나 떠들죠 뭐.

지인에게 아무렇게나 툭툭 던진 말이 떠오르는 날이다. 전공을 살려서 대단한 자리에 올라가지 않으면 뭐 어때. 이야기할 공간은 내가 만들기 나름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