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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오늘도 #3B8CCF

외국어 빌런

이쯤 되면 마음대로 언어를 술술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정말로.

조만간 있을 연주에서 내가 작곡한 실내악곡을 연주하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빈둥거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곡이라 곡 쓰는 과정이 어렵지 않았다. 복잡한 곡이 아니어서 합주 연습도 무난하게 지나갔다. 서정적이고 단순한 선율이 반복되어 연주자들도 (어렵지 않아서) 좋아했다. 

실제 공연에서 내가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건 기분이 또 색다르다. 곧 있을 온라인 연주회를 늘 그랬듯 약간의 걱정과 많은 설렘으로 기다리며 며칠 전 연주팀과 스텝팀 전체 화상 회의도 마쳤다. 스텝팀이 촬영 날 주의해야 하는 사항을 전달해 주고 연주팀도 필요한 장비를 이야기하며 무난히 회의가 진행됐다. 그리고 촬영 순서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회의 참석자 중 아무도 공감해주지 못할 나 혼자만의 고민이 생겼다. 연주 시작 전에 곡해설 영상을 찍을 예정이니 곡 설명을 준비해 오라는 거다. 그러니까, 영어로 곡 소개하는걸 무려 영상으로 찍어야 한다는 거죠 스텝 여러분들…?

연주 영상에 해설 자막을 넣는 건 어떠냐고 이야기해 봤지만 연주 전에 작곡/연주 당사자가 직접 곡해설을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우세하여 꼼짝없이 영상을 찍게 됐다. 아니 그건 해설을 유창하게 잘 할 때나 이야기죠… 카메라 앞에서 말 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주저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냥 짧게 찍으면 된다며 격려도 해줬다. 어느 정도 편하게 대화하고 있으니 뭐가 진짜 문제인지 생각도 하지 않는 거 같았다. 저기, 너네도 제2외국어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손짓과 표정을 적절히 섞으며 나누는 일상 대화와 혼자 뭔가를 설명하며 떠들어야 하는 건 부담감 자체가 다르다구… 혼자 좀 시무룩 해졌지만 뭐 어떡해. 1분도 안 되는 짧은 설명으로 사람들은 음악도 다르게 듣고 느낄 텐데 혼자 또 열심히 준비해 봐야지.

카메라나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게 떨리는 건지 아니면 외국어로 발표하는 게 여전히 더 긴장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사실 간이 병아리 콩알만 해서 둘 다 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연주를 시작하고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던 어느 때에 큰 공연을 앞두고 전체 리허설에 참석했다가 다짜고짜 공연 당일 재생할 개인 인터뷰 영상을 찍어야 한다고 끌려갔던 때에도,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엄청 당혹스러웠다. 카메라를 보고 인사할 때부터 아주 멋쩍었는데 곧바로 ‘연주하는 곡을 소개하자면?’, ‘연주하는 소감은?’, ‘나에게 Art Fusion 이란?’ 같은 질문들이 쏟아져서 머엉 하니 카메라를 쳐다보다 느닷없이 혼자 웃음이 터져서 NG를 냈다. 그리고 동시에 ‘너네 안 믿겠지만, 내가 한국말로 하면 진짜 다 조사버릴 수 있다니까!’ 하며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촬영팀이 같이 웃으며 장난쳐준 덕에 무난히 촬영은 끝났지만, 이후에 완성된 영상을 보곤 창피함과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백 가지 여도 카메라나 사람들 앞에서 내가 외국어로 뱉을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었다.

어디에서건 소규모 공연에서는 보통 연주와 멘트를 적절히 섞으며 진행하는데 처음엔 그거도 녹록지 않았다. 기본 대화는 가능했지만, 연주곡 소개라던가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유연한 분위기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연주 중 스몰토크가 너무 부담되어 어느 날은 아무 멘트 없이 연주만 계속 이어갔더니, 누군가 곡이 아름다운데 어떻게 그 곡을 쓰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향원익청, 어느 날 정자에서 놀다가 연꽃이 너무 예뻐 주돈이의 애련설을 생각하며..’ 같은 말을 줄줄이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그 긴 문장 중 영어로 옮길 수 있는 건 오직 ‘로터스’ 한마디뿐이었다. 하. 멀어질수록 향기가 더욱 맑다, 같은 말은 영어로 어떻게 깊고 담백하게 옮기나요. 정자를 파빌리온이라 부르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 영어 빌런 진짜 답답해서 원.

내가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걸 연주했으면 이런 답답함이 좀 덜 했을까. 나는 아직도 가야금 산조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일에 애를 먹는다. 전통 기악 독주곡이라고 하면 ‘산조’라는 말이 정확히 독주라는 뜻을 가지고 있냐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다. 유창하게 언어를 구사하게 되면 이런 한자 단어들도 깊고 고급스럽게 영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되려나 기대를 해보지만, 가끔 중국 사극 드라마를 영어 자막으로 볼 때면 그런 기대감도 산산이 조각난다. 어찌 됐든 유창한 말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이야 하겠지만.

문화적 배경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이쯤 되면 정말 언어 고민 없이 유창하게 술술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 진짜. 외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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