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나 행사 후에 따로 찾아와서 아시안 문화나 새로운 음악에 관심이 많다며 연주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연주 잘 들었다는 고마운 인사나 어떤 곡이 좋았는데 더 설명해 달라는 기분 좋은 대화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간혹 본인의 해박한 아시안 문화 지식을 나한테 늘어놓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대체 왜?!).
넌 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거고 난 실제 아시안인데. 이건 뭐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이마빡에 찍어 줘야 하나 생각하다가 좋은 게 좋은 거다 싶어 웃으며 넘기곤 하지만, 절대 그냥 넘겨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능숙한 발음을 칭찬해 달라는 듯이) 내 악기를 보며 고토나 고쟁이라고 부르는 일이다. 넓은 나무판에 여러 줄이 걸려 있는 장방형 악기가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고쟁은 중국 악기이며 고토는 일본 악기이고 그리고 내가 연주하는 가야금은 한국의 악기이다. 한·중·일 세 나라가 같은 나라가 아니듯이, 자세히 보면 생김새나 소리, 주법이 당연히 매우 다르다. 내가 뭐 대단한 애국자여서 한국 악기라고 굳이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각 악기가 가지고 있는 소리나 특성이 달라서 절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다른 건 다른 거다.
이런 당황스러운 경우까지는 아니지만, 한국에 있을 때도 가야금과 거문고를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서 잠깐 악기 소개를 하자면 가야금은 12줄 거문고는 6줄, 가야금은 손으로 거문고는 술대라는 나무 막대로 연주를 하고, 가야금은 안족이 각 줄을 받히고 있고 거문고는 괘와 안족이 줄을 받히고 있다. 가야금은 무릎 위에 평평하게 놓고 거문고는 비스듬한 각도로 세워 연주한다. 줄 수는 헷갈리는 경우가 가끔 있긴 한데, 가야금은 전통적으로 12현 악기이지만 요즘은 개량 가야금을 활발하게 연주하고 있어서 17현이나 18현 또는 25현 가야금도 많이 연주하고 있다. 뭔가 악기가 좀 크고 줄이 많다 싶으면 거문고보다는 가야금으로 찍는 게 정답 확률을 더 높일 수 있으니 참고해 두시길.
연주가 끝나고 굳이 ‘거문고 소리가 참 좋았어요’라고 인사해 주시면, 따로 인사해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인데 동시에 조금 난감하다. 나쁜 뜻 없이 웃으며 건넨 인사에 유감스럽게도 가야금 연주였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데다 가끔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럽게 가야금이라고 정정해 드리면 ‘그게 그건데 좋은 게 좋은 거니 넘어가지’ 하고 말씀하시는 사람도 놀랍게 적지 않다.
그렇게 이거나 저거나 비슷하게 생겼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냥 넘어가다 보면, 옛날 일이긴 하지만, 새천년의 새영화 포스터로 이런 웃지 못할 사진이 올라가는 일이 계속 일어날 수도 있다.
해외에 있으니 중국 커뮤니티의 규모에 자주 놀란다. 중국인들은 어딜 가나 존재하며 심지어 많다. 그러다 보니 서양 사람들이 가야금보다도 고쟁을 더 익숙해하는 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가야금은 고쟁이 아니다. 비슷하게 생겼으나 다른 악기이고 가야금은 한국의 악기라고 늘 힘주어 이야기한다. 하지만 가끔 한국에서도 가야금이나 거문고나 그게 그거라던,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 악기를 보며 다 똑같은 거문고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각 악기 하나하나마다 품고 있는 문화와 역사가 모두 다르고 그 다른 특성들이 모여서 각 나라의 문화 전반을 이룬다. ‘춘향뎐’은 옛날 옛적 영화이지만 20년이나 지난 지금 그때보다 몇 명이나 더 국악기를 구분할 수 있을까. 뭐 그거 못한다고 사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이야길 할 때마다 항상 추억의 옛날 만화 란마 주제곡이 떠오른다. 팬더가 됐다가 아기 꽃돼지가 됐다가,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되고 나의 모습을 찾아주세요. 열두 줄 혹은 25줄, 한국의 악기 가야금입니다. 나를 찾아주세요.
* 사진 출처 |
'여전히 오늘도 #3B8CCF'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발상황 (0) | 2020.07.03 |
---|---|
춤추는 임금님 (0) | 2020.06.15 |
핑크 똑단발 (0) | 2020.04.14 |
연주회가 끝났다. 내 뒤풀이는 어디에 (0) | 2020.03.24 |
잘 모르겠고 그냥 (0) | 2020.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