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가 시작되고 절실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내가 바로 진성의 집순이라는 거다. 걱정과 고민은 많지만 밖을 나가지 못해서 답답하다거나 집에만 있어 우울한 적은 여태껏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 알고 싶었던 사실은 아니지만.
집에서만 지내는 올해와 다르게 작년 여름에는 야외공연이 유독 많았다. 일은 한 번에 몰리는 법인가 보다. 아무래도 실내 공연보다 돌발상황이 더 많은 편이니, 야외공연을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습도에 민감한 악기라 혹시 소나기라도 한판 쏟아질까 봐 신경도 쓰이고. 다행히 날씨 운이 좋은지 소나기가 쏟아 내린 적은 없었다. 공연마다 스텝들이 좋아서 음향도 좋았고 여름 축제에 빠질 수 없는 푸드트럭의 맹렬한 그릴 연기도 내 차례는 기가 막히게 피해갔다. 화창하고 뜨거웠던 여름 야외공연. 겨우 작년 일인데도 모든 축제가 취소된 지금 그때를 생각하니 아득하게 먼 옛날 일인 것만 같다.
야외공연의 돌발상황이래 봤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건 주로 그런 것들이었다. 소나기나 푸드트럭에서 날아오는 연기, 음향 장비 문제 혹은 지나치도록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나 갑자기 문득 쌩쌩 부는 강풍 같은, 평이한 상상만으로 가능한 상황들. 별 탈 없이, 심지어 나는 야외 공연 운이 좋은가보다 생각될 만큼 무탈하게 지나가다 문제는 어느 날 공원에서 일어났다.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공원의 야외무대에서 기악 연주자 다섯 명이 모여 즉흥 연주를 선보이는 공연이었다. 시작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스텝들과 인사하며 악기를 들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던 중 갑자기 발이 마치 칼에 찔린 듯이 말도 안 되게 아프기 시작했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의 아찔한 통증에 더 걷지 못하고 발을 내려다보니 큰 벌에 쏘인 듯 했다. 내 참, 아무리 별의별 상황이 다 있다지만 공연 직전에 벌에 쏘일 줄이야. 한여름 잔디밭에 샌들 신고 살랑대며 걸어간 내 잘못이 컸다. 그치만 샌들 신었다고 도심 한복판의 잔디밭에서 벌에게 쏘일 수도 있다는 상황은 내 평이한 상상력이 차마 미치지 못한 부분이었다.
산들산들 잘 걸어오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니 놀란 스텝들이 뛰어와 짐을 들어주고 부축해 줘서 자리에 가서 앉긴 했지만, 통증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같이 온 친구가 놀라서 약국으로 달려가 당장 알레르기 약과 연고를 사 오긴 했지만, 그걸로 통증을 누르기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벌에 쏘였다고 시간이 놀라서 멈추는 거도 아니고. 공연 시작 시각은 점점 가까워지고 음향 스텝뿐만 아니라 촬영 스텝들까지 모두 준비가 끝났는데 나는 더욱 심해지는 통증에 온몸이 다 떨려왔다. 그래서 내가 그 통증에 울면서 집에 갔느냐면, 지금 생각하면 좀 미친 거 같긴 한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와중에 웃으면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한쪽 다리를 계속 달달 떨면서. 그나마 즉흥 연주 공연이라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연주를 이어갔다. 연주라기보다 손가락을 계속 움직였다는 말이 더 맞는 거 같다.
공연이 끝나고 그 엄청난 통증에 울면서 집에 갔냐면, 그거도 아니고 심지어 다음날을 위해 공연 연습을 하러 또 갔다. 연습이 끝나고 밤늦게서야 불덩이 같은 몸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정말 순수하게 너무 아파서 엉엉 울었다. 옆에서 약을 발라주고 얼음찜질을 해주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도 통증에 정신이 없어서 나도 어쩔 줄 모르고 그냥 울었다.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약을 먹고 발을 쩔뚝이며 약속된 스케줄을 모두 끝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악착같이 다 했을까. 어떤 공연이든 도저히 취소할 수가 없었다. 일 욕심도 적당하지 않고 너무 많으면 정신건강에 해로운 법인데, 그때 나는 전혀 몰랐다. 어휴, 지금 생각해보니 벌 알레르기가 없어서 천만다행이지 만약 있었다면 공연 도중에 몸이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했을 테고… 여름밤에 기분 좋게 공연 즐기러 나온 관객들은 그게 무슨 호러 영화 같은 장면이었을까.
올해 여름은 야외든 실내든 모든 공연이 다 취소되고 자의(가 좀더 많은) 반 타의 반 집순이가 되어 요즘 온라인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돌발상황은 생기기 마련이고, 이런 상황이 처음이다 보니 온라인 공연에서 생길 수 있는 돌발 상황은 어떤 일일지 나의 평이한 상상력으로는 가늠도 안 된다. 사실 온라인 라이브 공연이란 것 자체가 돌발 상황이라는 생각도 들고.
작년에 있었던 돌발상황으로 내가 얼마나 간절히 일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지금의 이 상황도 지나고 나면 힘들었으나 그 일로 조금 성장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잘 지나갔으면 좋겠다.
공연업계의 모든 분께, 미약하지만 진심의 응원을 보낸다. 우리 존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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