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도처에서 올라오는 호두까기 인형은 백조의 호수와 더불어 대표적인 클래식 발레다. 누군가에는 어린 시절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서 입문하는 공연이고, 발레단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는 무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큰 관심이 없었어도 호두까기 인형만큼은 연말 분위기를 내고자 예매하는 사람도 많기에, 발레단은 호두까기 인형으로 수익을 내서 적자를 메운다고들 한다. 그런데 유례없는 역병으로 호두를 못 깔 수도 있다니?
원래는 두 군데를 관람한 다음에 후기를 올릴 예정이었다. 감상이 요원해진 지금,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엔 아쉽기에 영상 클립으로나마 즐겨보려 한다. 호두까기 인형은 어린이 눈높이에도 맞을 만큼 단순한 이야기다. 클라라 또는 마리 또는 마샤(프로덕션에 따라 다름)와 프리츠 남매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린다. 마법사이자 대부인 드로셀마이어는 우스꽝스러운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로 준다. 인형을 소중히 안고 단잠에 빠진 소녀의 꿈속에선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막이 열리면, 아이들이 씩씩한 걸음걸이로 행진을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며 신난 모습이다. 음악만 들어도 들뜬다. 영국 로열 발레단.
아역은 대부분 실제 어린이 무용수들이 맡지만, 그렇지 않은 버전도 있다. 위 클립인 볼쇼이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이 대표적인데, 국립발레단이 이 안무를 쓴다. 이 시기에 많이 올라오는 질문엔 국립과 유니버설 호두까기 인형의 차이점이 있다. 발레 관련 정보가 거의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 초록창 지식인 기준으로 답한다. 국립은 어린이가 없고 테크닉이 역동적인 성인용이며 유니버설은 어린이가 나와 귀여운 아동용이라고 하는데, 엄연히 말하자면 아니다. 가끔 문화면 기자도 잘못 표현하더라. 최근에 직접 본 적 없는 모양이다! 예전엔 성인 주역 무용수가 전막을 했으나 몇 년 전부터 국립도 아카데미생들이 1막을 맡는다. 사정에 따라 신장이 작은 단원이 아역을 맡기도 한다. 지역공연은 대부분 단원들이 맡고, 호두까기 인형 역할만 어린이다. 서울 공연은 대개 어린이 무용수가 1막을 진행하는데 2018년에는 1막 어린 마리와 2막 어른 마리를 성인 단원이 나눠서 맡았고, 2019년에는 다시 어린 무용수로 돌아왔다.
나긋나긋한 음악에 맞춰서 어른과 아이 모두 파티를 즐긴다. 뉴욕 시티 발레단. 전형적인 서양 중산층 가정의 광경을 엿볼 수 있다. 반짝이는 트리와 형형색색의 선물 상자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자아낸다.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장난감 인형들.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며 딱딱 소리를 내는 할리퀸 인형의 춤이 탄력 있다. 발레리나 인형인 콜롬빈은 딱딱한 인형 관절을 흉내내면서 똑 부러지는 동작을 수행한다. 참고로 콜롬빈은 한국인 이수빈 무용수. 주로 서정적인 감정 표현을 다루는 역할로 많이 봤는데 인형도 감쪽같이 잘 소화한다. 마지막은 보스턴 발레단의 자랑인 곰 인형. 호두까기 인형의 기본이 되는 바이노넨 판은 이 음악에서 블랙페이스로 비판받을 분장을 해서 찝찝한데, 대형 곰 인형이 아쉬움을 씻어낸다. 두꺼운 인형 옷 안에서도 디테일이 살아나는 안무 소화력이 일품! 살짝 맛이 간(?) 눈동자에도 시선이 간다.
호두까기 인형을 망가뜨린 프리츠! 볼쇼이에서는 호두까기 인형을 목각 인형이 아닌 사람이 맡는다. 이 영상물은 현재 소장중인데 처음 봤을 땐 너무 큰 인형에 잠시 당황했다. 국립발레단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조그마한 어린이가 앙증맞은 인형 역할을 한다. 저 거대 인형을 선물받았다면 다들 거부할 법도 하겠다!
취향 차이지만 목각 인형이 나오는 쪽을 선호한다. 작은 인형을 들고 춤출 때 움직임이 더 가볍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프리츠가 인형을 팍 던지면서 파손시키기 때문에 예비 인형들이 필요하다. 알리나 코조카루의 과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자아이들이 깽판 치는 스케일이 정말 남다른 영상물.
무시무시한 쥐떼와 쥐 왕의 등장. 모스크바 발레단. 호두까기 병정들이 쥐와 싸움을 벌인다. 이 장면에서 대포가 터지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어린이 관객들도 있다. 꾸벅꾸벅 졸던 관객이 번뜩 정신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 장면부터 꿈이다. 쥐떼가 들끓는다면 여러가지 의미로 공포겠다. 흑사병이라거나, 또 흑사병이라거나!! 앗, 헛소리 죄송. 전염병에 노이로제가 생겨서 그만.
클라라 또는 마리는 용기를 내서 쥐에게 슬리퍼, 쿠션, 양초 등을 던진다. 쥐떼들은 힘을 잃고 물러나며 쓰러진 줄 알았던 호두까기 병정은 근사한 왕자로 변신한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이 장면은 어른으로 자란 클라라와 호두까기 왕자의 스노우 파드되다. 변신할 땐 어린 무용수와 병정이 조명이 켜지기 전에 필사적으로 뛰어간다. 예전에 지방 공연에서 조명이 덜 꺼지는 바람에 그 장면을 1열에서 적나라하게 본 적이 있다. 난 재미있었지만 어린이 관객들은 환상이 좀 깨졌을까?
바가노바 아카데미의 눈송이 왈츠! 세계적인 레벨을 자랑하는 아카데미생들의 멋진 군무를 감상할 수 있다. 졸업 이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마리아 호레바와 마리아 블라노바(이름이 같다!)의 학생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다. 휘날리는 눈송이는 프티파의 조수 이바노프의 역작. 새하얀 클래식 튜튜를 입고 바닥에 일제히 엎드리는 동작이 조각처럼 정교하다.
뉴욕시티 발레단의 눈송이 왈츠는 물색 로맨틱 튜튜를 착용한다. 살짝 파르스름한 몸판 색감이 차가운 눈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여러 모양으로 변하며 흩날리는 눈송이들의 모습을 표현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날아오던 싸락눈이 어느새 점진적으로 늘어나면서 풍성한 함박눈으로 변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위에서 떨어지는 눈송이 효과도 겨울 분위기를 보여주는 장치. 중간에 발레로는 드물게 합창이 등장하는데 이 울림이 신비롭다. 참고로 발란신 버전은 원작에 더 충실한 버전이며, 소녀가 어른으로 변하지 않는다.
과자의 나라에서는 각국의 민속춤이 펼쳐진다. 마린스키 발레단 스페인 춤! 달콤한 초콜릿을 의미한다. 트럼펫의 경쾌한 음색이 정열적인 스페인 춤을 장식한다. 엄밀히 말하면 스토리 진행에는 큰 관련이 없으나 관객들에게 여흥을 제공하고 솔리스트들의 기량을 뽐내는 이런 춤들을 디베르티스망이라고 부른다. 짤막한 춤들의 나열! 각자 상징 국가와 디저트가 있다.
볼쇼이 발레단 중국 춤! 마시는 차를 상징한다. 저음역대인 더블베이스와 바순의 반주 위로 고음역대의 플루트와 피콜로의 낭랑한 소리가 아담하고 깜찍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 시절 서양 예술가들이 거의 그랬겠지만, 차이콥스키는 동양에 관해서 잘 몰랐기에 이 음악은 실제 중국과 별개로 상상 속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부채를 들고 연속으로 통통 튀어다니는 안무가 인상적이라 인기 있는 춤이다.
로열 발레단 아라비아 춤! 커피를 의미한다. 차이콥스키는 안무가 프티파의 권유로 그루지아 지방의 동양적인 자장가를 채택했는데, 잉글리시 호른 또는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구슬프고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쌉싸름한 커피의 맛을 묘사했다고 한다. 이 역시 차이콥스키가 상상한 동양의 분위기다. 안무에서도 어쩔 수 없는 오리엔탈리즘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이 춤은 특히 호불호가 강한데, 내 경우에는 어느 버전이든 꽤 오랫동안 고비였다. 심지어 음악이 길기까지 하다!
보스턴 발레단의 러시아 춤 트레팍! 친숙한 음악이다. 누가 러시아인 아니랄까봐 빠른 박자의 박력 넘치는 러시아 민속 음악을 만들어냈다. 트레팍은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지방의 강렬한 3박자 춤곡을 뜻한다. 활기찬 바이올린 연주와 신나는 탬버린 반주에 맞춰서 높은 점프와 재빠른 턴으로 러시아 농민들의 민속춤을 선보인다. 이는 막대사탕을 상징한다.
갈대피리 춤! 원어인 mirliton은 풀로 만든 피리 또는 아몬드 크림을 뜻한다. 식물이자 디저트 재료로 두 가지 뜻이 담긴 언어유희다. 마지팬(marzipan, 으깬 아몬드를 설탕과 버무린 유럽식 구움 과자)으로도 불린다. 대개 목동의 춤으로 묘사되는데 이 영상은 발란신 안무인 퍼시픽 노스웨스트 발레단으로 풀로 만든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춘다.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3인무. 바가노바 아카데미 학생들이 단독으로 공연할 때도 있다. 달콤한 피치카토 반주와 맑은 플루트 선율에 맞춰서 사랑스러운 춤을 선보이는 어린 학생들이다. 이 음악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멜로디를 지니고 있다. 발레단별로 특색이 다르지만, 음악과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동작이 이어진다. 주로 프랑스를 상징한다. 좋아하는 춤이기에 부득이하게 더 추가했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양치기 소녀와 늑대. 이 짧은 음악으로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기분. 스토리텔링이 확실하며 뛰어난 안무다. 양치기 소녀와 아기 양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나타난 늑대! 금관악기가 단조로 조성을 바꾸면서 새로운 주제를 연주할 때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늑대의 만행. 양치기 소녀가 부레부레로 뒷걸음질치며 우는 리액션이 귀엽다. 다시 처음의 주제가 등장하며 상황은 반전! 아기 양들의 활약과 양치기 소녀의 승리감. 객석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뉴욕시티 발레단 마더진저 봉봉 춤! 넓고 커다란 치마를 입은 부인이 뒤뚱거리면서 익살스럽게 나온다. 그 안에서 꼬물거리던 아이들이 차례대로 나와서 무대를 돌아다니며 재롱을 부리다가 도로 치마로 들어간다. 최근엔 이 춤을 올리지 않는 발레단이 더 많다. 국내 발레단에서는 아주 예전에 본 기억. 뛰어다니다가 쏙 들어가는 아이를 실제로 보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깜찍하다. 이 버전은 주인공이 2막까지도 계속 아이로 남은 상태로 뒤에 앉아서 구경하는 형태다. 더 두서 없는 아이의 꿈 느낌이라서 재미있다.
대망의 꽃의 왈츠! 유명한 음악이다. 하프의 꿈결 같은 연주로 시작한다. 감미로운 멜로디에 맞춰서 사뿐사뿐하고 가벼운 꽃잎들의 향연을 볼 수 있다. 1막엔 본격적인 꿈의 세계로 안내하는 눈송이 왈츠가 있다면 2막엔 막바지를 화사하게 장식하는 꽃의 왈츠가 나온다. 겨울의 이미지와 봄의 이미지를 다 감상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꿈은 끝나가지만, 소녀의 앞날이 봄날의 만개한 꽃처럼 따사롭고 아름답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2막 그랑 파드되! 어른으로 변한 클라라 또는 마리가 호두까기 왕자와 춤을 추는 내용이다. 초연 안무에서는 주인공이 그랑 파드되를 추지 않았는데, 이는 프티파가 설정상 어린 소녀인 클라라가 남자와 로맨틱한 파드되를 추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생한 캐릭터가 과자의 나라를 주관하는 슈가플럼 페어리(사탕요정)인데, 바이노넨이 키로프 극장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재안무할 때 성인이 된 클라라가 왕자와 춤을 추도록 만들었다. 꿈의 세계에서 분리된 두 주인공을 합치는 과정이었다. 감상자에 머물렀던 소녀가 능동적인 주체로 변해서 왕자와 춤을 추게 된 것. 주인공의 활동이 부각되는 매력적인 설정이기에 이를 답습하는 발레단이 많다.
물론, 여전히 분리된 슈가플럼 페어리의 춤을 채택하는 프로덕션도 존재한다. 이 설정의 특징은 더 몽환적인 꿈속 세계에 참여하는 기분이 든다는 점이다. 주인공과 함께 초대받아서 춤을 감상하는 느낌?
바리에이션 역시 더 위엄이 가득한 과자 나라의 여왕의 포스를 풍긴다. 요정으로 변한 클라라 또는 마리가 추는 춤과는 꽤 다른 분위기.
마음에 들어서 추가해보는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슈가플럼 페어리. 이 컴퍼니도 내실 있고 괜찮은 곳인데 공개된 영상이 많지 않아서 아쉽다. 금빛 의상이 특징적.
콩쿠르에서는 이 바이노넨 슈가플럼 페어리 안무를 많이 쓴다. 발끝으로 쪼르르 무대 전체를 활보하는 동작이 요정다운 안무. 첼레스타의 영롱한 소리와 잘 어울린다. 파리 여행 중 세상의 소리가 아닌 듯 새로운 음색을 지닌 이 악기에 매료된 차이콥스키는 다른 작곡가들의 귀에 들어가기 않도록 당부하며 비밀리에 구매했다고 한다. 소리를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물 속에서 빛나는 보석처럼 명멸하는 음색에 차이콥스키의 신비로운 멜로디가 더해져 시너지 효과를 낸다.
니나 캅쵸바의 사랑스러운 춤. 개인적으로 볼쇼이 버전 호두보다는 다른 버전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유리 할배가 안무를 워낙 힘들게 만들어놔서 조금이라도 기량이 처지는 솔리스트가 있으면 아슬아슬한 탓이다. 그래서 전체 캐스팅도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주역과 솔리스트 캐스팅이 전부 맘에 드는 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러 가는 큰 이유는 슈가플럼 페어리 안무다. 톡톡 튕기는 손, 콩콩 찌르는 발끝을 시작으로 색채감 넘치는 동작을 보여준다. 봐도 봐도 새롭다.
지금껏 나온 무용수들이 피날레를 장식하면 이제 꿈에서 깰 시간. 환상적인 꿈에서 깨어나서 남다른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이한 소녀는 한 뼘 성장했으리라.
호두까기 인형은 순수한 소녀의 시점에서 바라본 환상, 소녀의 꿈 그 자체다. 공상에서 만들어 낸 세계는 나이가 들어가며 깊숙이 매몰해버린다. 어느새 조각난 어린 시절 꿈결의 한 자락을 만나는 작업이기에, 호두까기 인형을 매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꿈의 인도자인 무용수들이 호두를 잃은 겨울을 너무 좌절하지 않고 보내길 바란다. 또 내년에는 자유로운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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